학교란 무엇인가 19

# 날로 먹기

2022년 5월 25일 자 한겨레 신문 통신비·전기료…재택근무 비용을 왜 직원이 내야 하죠? https://www.hani.co.kr/arti/society/labor/1044241.html 1990년대 초의 얘기다. 공업/기술을 가르치는 M 선생님은 담당 과목에 어울리게 여러 쓸모 있는 기술을 갖추셨다. 전공인 전기에 특히 밝아, 청계천에서 부품을 사다 점프선을 직접 만들어주시는 등 그야말로 '맥가이버'급의 능력을 주변에 베푸셨다. 참고로, 점프선은 당시 운전자들에게 요긴했던, 이제는 추억의 물건이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지나가는 차라도 세워 양해를 구하고 그 차의 배터리와 연결해서 급한 대로 시동 걸고 출발하게 해 준 전깃줄이다. 웬만해선 배터리 방전을 겪지 않는 요즘 젊은 세대에겐 낯선 도구일 것이다..

# 의대가 뭐라고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K대학교를 비롯해 의료원, 남/여고, 남/여중, 초등학교, 유치원으로 이루어진 학교법인에 소속되었다. 매년 수능고사 직후엔 대학별 논술고사가 이어지고, 같은 재단에 속한 학교의 교직원들은 K대학교의 논술 고사에 감독으로 차출된다. 그 해에도 예년처럼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시험 감독을 했는데, 무작위로 감독 배정이 되기 때문에 매번 다양한 학부/학과의 수험생을 경험한다. 그날 나는 의예과 지원자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의예과 수험생들... 장차 의사가 되어 생명을 구하거나 의과학자가 되어 의술의 발전에 이바지할 사람들이 아닌가. 자연계열의 최우등생이라면 의대를 지원하는 게 당연시되는 시대니 의예과 논술고사를 보러 온 아이들은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공부의 신'이라 할만하다. 내가 ..

# 한나절 땡볕

옛날 어른들은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두 달이라도 먼저 태어난 녀석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햐~! 한나절 땡볕이 다르긴 다르네." 유아기에는 확실히 한두 달 차이가 크다. 한나절만 더 땡볕을 쬐어도 차이가 난다고 농을 섞어 과장을 했는데, 어느 정도 크고 나면 한두 달 차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마련이다. 그럼 고등학생의 '1년 땡볕'은 어떨까. 지리과 K선생님은 처음 뵈었을 때 이미 머리가 정수리 너머까지 벗어진, 그야말로 '완벽한 대머리'셨다. 수년간 같이 근무하며 그 모습에 낯이 익어버렸는데 정년이 다 되신 마당에 가발을 새로 맞춰 쓰신 거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표현하기가 민망하면 사람들은 그냥 조심스러운 인사치레만 한다. 적당히 모른 척하는 게 예의라는 것 정도는 알기 때문..

# 교사가 뭘 안다고...

살면서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니이~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잘 아는데도 (건방지게) 나보다 더 잘 아는 척하는 사람에게나 내지르는 말이다. 이런 훈계조 다음엔 친절하고 논리 넘치는 교정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오래전 일이다. 학교 동창들을 만나고 온 아내는 모임에서 황당한 말을 들었다며 혀를 찼다. 아내는 당시 근처 중학교 교사였고, 이미 20년 가까이 수많은 아이들의 다양한 모습과 현장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고 있던 참이었다. 친구들이 만나서 하는 얘기의 주제는 대략의 분류가 가능하다. 20대엔 학업, 연애, 취업, 결혼, 30대에는 직장, 결혼, 출산, 육아, 주거, 40대가 되면 직장, 주거, 자녀 교육 등의 범주에서 얘깃거리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50대엔... 회고해 보니 초반엔 입시,..

# 완벽한 세상, 완전한 교사

매년 교육실습생들이 온다. 그 시기가 꽃이 피고 새가 울어 덩달아 우리의 마음도 싱숭생숭해지는 4~5월이다. 가뜩이나 갑갑한 학교가 싫은 아이들은 그냥 누군가가 새로 온다는 소식에도 마냥 신난다. 이렇게 교생들이 오면 (각 잡히고 진지해야만 할 것 같은) 면학 분위기가 흐려지기 마련이라, 대학 입시에 목매는 대개의 인문계 고등학교 중엔 교생을 아예 받지 않는 곳도 있다. 하지만 우리 학교처럼 무슨 부속이니 병설이니 하면서 대학교 재단에 속해있으면 관례상 교생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매년 같은 캠퍼스 안의 K대학교를 비롯해 주변 H외대, K대학교 등의 교생들을 받아 한 달간 실습을 시킨다. 과목이나 담임 여부에 따라 교사 한 명이 교생 한두 명을 지도하는데, 4주간의 과정이 끝나면 그간의 수고에 ..

# 칭기즈칸의 중국 음식점

19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남자고등학교의 수업 분위기는 군대와 닮아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혹한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데다 군사 독재의 찬바람으로 사회가 경직되었으니, 학교라고 이런 분위기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게다가 (선생님마다 스타일과 무서움의 정도는 달랐지만) 남자만 있는 집단에선 군내나 학교나 할 것 없이 강압적인 명령/지휘/지도에 복종하는 게 규칙이자 법이었다. 내 몸인데도 허락 없이 움직일 자유는 없었다. 수업 중 화장실에 가기는커녕 옆 사람과 잡담을 하다가 걸리면 체벌을 각오해야 했다. 지루한 수업 중 선생님이 분위기 전환용으로 간혹 썰렁한 여담이라도 해야 '허가받은 시시덕거림'으로 잠시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신입생들은 처음엔 남자고등학교의 '냉기'에 잔뜩..

# 이기주의 끝판왕

사람도 어차피 생존을 하고 유전자를 남겨야 하는 생물인지라 조금이라도 이기적이지 않을 수 없다. 오죽하면 제목이 로 된 베스트셀러도 있지 않은가. (사실 이 책은 이론의 본질과는 다른 제목으로 어그로를 끌어 성공한 면이 있다.)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살아가려면 타고난 이기적 속성을 조금씩 양보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하려면 눈곱만큼이라도 자기 성찰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을 접고 앞으로 생길 손해를 감내할 정도의 실천 의지가 우리 각자에게 있는가가 문제다. 2017년 가을은 나의 직장 생활 중 극심한 스트레스를 마주했던 때로 기억한다. 땀 흘리는 육체노동이거나 밤새도록 문서를 작성하는 일로 힘들었다면 차라리 나았다. 어마무시한 양의 일일지언정 그 과정과 결과에서 일말의 보람이나 종잇장 무..

#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30대 중반이었을 때, 어느 회식 자리였다. 옆에 앉으셨던 지리과 K선생님은 내 나이를 물어보시고는 일순 얼굴이 환해지셨다. "아, 그럼 호랑이띠 아녀요? 반갑구먼. 나도 호랑이띠인디." 어울리는 걸 좋아하여 무엇이든 남과 연결하고픈 사람들은 같은 띠인 것만으로도 동질감을 느낀다. 그 선생님의 연세에 크게 관심이 없던 나는 무심하게 내 나이에 열두 살을 더해 대꾸했다. "음... 그럼 선생님은 47세이시군요." 사람에 따라선 나이와 피부 상태가 딱 맞게 보이지 않기도 한다. 난 그저 그분의 얼굴에서 그 나이쯤의 느낌을 받았을 뿐... "어... 어... 띠 동갑은 맞는데... 난 사실 당신보다 스물네 살이 많은걸. 허허!" 둘 다 당황했다. 그 선생님은 내가 무심코 뱉은 말에 갑작스러운 횡재를 얻은 표정..

# 학교란 무엇인가

한때 즐겨 듣던 팟캐스트가 있었다, 제목은 '그것은 알기 싫다'. 유명 TV 탐사 프로그램 이름인 '그것이 알고 싶다'를 장난스럽게 비튼 제목이라 수준이 얕을 것이라는 인상과는 달리 다루는 주제의 폭과 깊이가 놀랄 만했다. 그리고 분야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에피소드가 늘 새로웠다. 바로 기억나는 것만 해도 일본을 충격에 빠뜨렸던 '옴진리교 사린가스 살포 사건', '홍석동 필리핀 납치 사건', 지방선거 후보자에 대한 정보를 무지막지하게 파줬던 '지방선거 데이터 센트럴', '언론의 어뷰징(Abusing) 기사' 같은 것이었다. 대부분 일상에선 일회성 뉴스로 지나쳐버린 이런 이야기들을 여러 각도에서 다루었는데 그 수고와 노력이 대단해 보였다. 덕분에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너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