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이었을 때, 어느 회식 자리였다. 옆에 앉으셨던 지리과 K선생님은 내 나이를 물어보시고는 일순 얼굴이 환해지셨다. "아, 그럼 호랑이띠 아녀요? 반갑구먼. 나도 호랑이띠인디."
어울리는 걸 좋아하여 무엇이든 남과 연결하고픈 사람들은 같은 띠인 것만으로도 동질감을 느낀다. 그 선생님의 연세에 크게 관심이 없던 나는 무심하게 내 나이에 열두 살을 더해 대꾸했다.
"음... 그럼 선생님은 47세이시군요." 사람에 따라선 나이와 피부 상태가 딱 맞게 보이지 않기도 한다. 난 그저 그분의 얼굴에서 그 나이쯤의 느낌을 받았을 뿐...
"어... 어... 띠 동갑은 맞는데... 난 사실 당신보다 스물네 살이 많은걸. 허허!"
둘 다 당황했다. 그 선생님은 내가 무심코 뱉은 말에 갑작스러운 횡재를 얻은 표정이었다. 나는 뭔가 실수를 했다는 생각에 어쩔 줄 몰랐고, 다급한 나머지 몰라 뵈어 죄송하다는 말로써 상황을 모면하기 바빴다.
회갑이 내일모레였던 그분은 나이에 관한 한 그런 상찬(賞讚)은 처음 들은 게 분명했다. 이 일이 있은 뒤 그 선생님과 나의 관계는 Fantastic이란 단어로는 부족할 정도가 되었다. 실상 내가 뭐라도 해드린 건 없고 단지 본의 아닌 말실수만 일어났을 뿐인데, 그 선생님은 그 뒤로 나만 보면 싱글벙글하셨다. 술자리에서 불콰해지면 항상 나한테 다가오셔서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었다.
"김 선생, 그때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나? 나를 그렇게 젊게 봐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이런 일도 있었다. 점심시간을 앞둔 시간, 내 귀에 대고 말씀하셨다. "아직 식사 안 했으면 나하고 같이 좀 가시지." 선생님은 학교 정문에서 200미터 정도밖에 안 떨어진 빌라에 사셨다. 마침 가족들이 외출한 틈이었는데, 나를 식탁 의자에 앉히시고는 주방에서 분주하게 뭔가를 조리하셨다. 나보다 스물네 살이나 더 드신 분이 주방에서 일하는 걸 보고만 있으려니 좀 민망했지만 할 수 있나, 앉아 있으라면 잠자코 앉아 있어야지.
얼마 후 큰 전골냄비가 식탁 위에 대령되었고, 그 안에선 거대한 잉어찜이 우리의 미각을 홀리고 있었다. 그분은 낚시에 대단한 취미와 애정이 있으셔서 나를 포함한 여러 선생님들이 새벽 공기를 가르며 낚시터를 향해 달리는 일을 진두지휘하시곤 했다. 그 잉어는 바로 며칠 전 혼자 낚시를 가셔서 잡아 올린 월척이었던 것이다. 그걸 아무에게도 말씀 안 하시고 손수 다듬고 요리하여 '나이를 대폭 깎아준 고마운 김 선생'에게만 대접하신 거다.
이런 식으로 해드린 것 없이 그저 말 한마디로 그 선생님의 퇴임 날까지 귀여움(!)을 받았다. 간간히 생기는 물적인 이득도 당연히 좋았으나 나만 보면 입이 귀에 걸리는 그분의 천진함을 보는 일이 더욱 좋았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과 결은 좀 어긋나지만, 말 한마디가 훈훈한 Happy Ending을 만든 건 분명하다.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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