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엇인가

# 의대가 뭐라고

볕좋은마당 2022. 3. 26. 21:59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K대학교를 비롯해 의료원, /여고, /여중, 초등학교, 유치원으로 이루어진 학교법인에 소속되었다. 매년 수능고사 직후엔 대학별 논술고사가 이어지고, 같은 재단에 속한 학교의 교직원들은 K대학교의 논술 고사에 감독으로 차출된다. 그 해에도 예년처럼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시험 감독을 했는데, 무작위로 감독 배정이 되기 때문에 매번 다양한 학부/학과의 수험생을 경험한다. 그날 나는 의예과 지원자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의예과 수험생들... 장차 의사가 되어 생명을 구하거나 의과학자가 되어 의술의 발전에 이바지할 사람들이 아닌가. 자연계열의 최우등생이라면 의대를 지원하는 게 당연시되는 시대니 의예과 논술고사를 보러 온 아이들은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공부의 신'이라 할만하다.

 

내가 감독하러 들어간 교실에 어떤 수험생이 있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이미 영특했을 것이다. 초등학교에선 도맡아 발표를 하고 뛰어난 기재를 보였을 테다. 중학생 때는 전체 1, 2등을 너끈히 했을 것이다. 과학고를 갔을 수도 있지만, 일반고를 갔다 해도 내신 1등급은 유지했을 테고, 자연계를 선택했겠고, 모의고사 결과는 언제나 돋보였을 것이다. 담임과 부모님은 당연히 아이를 의대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혹여 조금이라도 부족한 틈이 있으면 학원이든 개인과외든 가정의 자원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주변의 기대와 달리 아이는 의사가 될 생각이 없었고, 그래서 의대를 고집하는 부모와 갈등이 싹텄을지도 모른다. 여태껏 해 준 게 얼마인데 왜 의대를 가지 않냐고 꾸지람도 들었겠다. 그래도 원서라도 내고 시험을 보라는 부모의 압박이 있었을 것이다. 합격하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는 의학엔 관심 없고 공학이나 순수과학 쪽으로 가겠다며 버텼고, 부모는 그래도 돈 많이 벌고 나이 들어서도 제일 괜찮은 게 의사라며 강권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부모와 아이는 극심한 언쟁을 치렀고, 감정의 골이 깊어졌을 수도 있다. 

 

부모의 고집과 아이의 소신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고, 애원하는 부모를 위해 아이는 시험이나 보겠다며 한발 물러섰고, 결국 부모가 태워주는 차로 시험장에 왔을 것이다. 못 미더운 부모는 아이가 시험장 학교로 들어가는 뒷모습까지 보고서야 안도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는 시간에 맞춰 교실에 들어와 앉았고, 감독으로 들어간 내가 문제지와 답안지 등을 나누어줬을 것이다.

 

논술 시험장까지는 들어왔지만 아이는 뜻을 굽히는 건 굴욕이라 느꼈을 것이다. 이미 십수 년에 걸쳐 시험에서라면 최고 성적을 내 온 터라 받아 본 문제가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보다 훌륭한 답을 썼을 테고, 의예과엔 보란 듯이 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 현실은 상상을 보란 듯이 배반한다. 그 아이는 문제지와 답안지를 받자마자 수험번호와 이름을 쓰고는 바로 엎드려 자기 시작했다. 시험 시간 120분 동안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고 내내 엎드린 채였다. (실제로 잤는지 그냥 눈을 감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수험생에게는 바쁘고 빠듯하지만 감독관에게는 지루한 두 시간이 갔다. 시험 종료 방송과 함께 수험생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펜을 놓았고 정감독관과 부감독관은 서둘러 답안지를 걷었다. (한 교실에 배치된 감독관 두 명 중 고등학교 교사이거나 나이가 많은 교사는 대부분 정감독관이 된다.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나는 거의 언제나 정감독관이었다. 이런 젠장!) 정감독관은 답안지를 점검했다. 도장을 안 찍은 곳은 없는지, 수험번호는 잘 표기되었는지, 이름이 빠진 곳은 없는지 등을 빠르게 확인하면서 답안지를 셌다.

 

의예과 시험실답게 공부 잘하는 수험생들은 거의 모두 답안지를 빼곡히 채웠다. 그중에서 '거의 텅' 비어서 눈에 확 띄는 답안지가 있었다. 두 시간 내내 엎드려있던 그 아이의 답안지... 그 넓은 답안지에 적은 단 한 줄을 보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의대 안 가,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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