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엇인가 13

# Denotation vs. Connotation

몇 번 청강을 했던 의미론(Semantics)에서였는지 전공 필수였던 언어학 개론에서였는지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은 안 난다. 당시엔 인상적이었으나 세월에 묻혀 거의 잊힌 두 단어 - denotation과 connotation - 가 최근 내 머릿속 어느 구석으로부터 소환되었다. 사전의 설명에 따르면 대략 이렇다. denotation은 '표시 의미, 명시적 의미, [논리학] 외연: 기호로 표시되는 것', connotation은 '암시 의미, 언외의 의미, 함축, [논리학] 내포'. 음... 역시 어렵다. 좀 더 찾아보면 denotation은 '문자 그대로의 뜻, 사전적 의미'이고 connotation은 '단어가 가진 정서적, 개인적, 문화적 연관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어디선가 찾은 영어의 사례... 설명..

# 세상은 변한다지만

1990년대 학교 풍경이다. 어느 날 사회과 N선생님은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책상 위에 책을 쾅 소리가 나도록 내리치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힘들어서 못 해먹겠네. 아, 글쎄 수업 시간에 애들이 움직여!" 이해하기 좀 어렵겠지만, N선생님은 당시 50대였고 이미 20년 이상 학생들의 수업태도가 변해가는 과정을 지나오셨다. 그러니까 적어도 당시 기준으로 20여 년 전에는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몸을 움직인다는 게 용납되지 않았던 거다. 2000년대 학교 풍경이다. 어느 날 국어과 L선생님은 수업 후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책상 위에 책을 쾅 내려놓고는 말씀하셨다. "에이, 힘들어서 못 해먹겠네. 아, 글쎄 수업 시간에 애들이 졸아!" 마찬가지로 L선생님도 당시 50대였고, 적어도 얼마 전까지만 ..

# Bashing 3

앞의 글 에서 우리의 영어 교육이 어떻게 사람들의 술안줏감이 되었는지 얘기했다. 여기선 그런 비난이 온당치 않음에 대해 톺아보겠다. 넓게는 우리의 영어 교육 시스템, 좁게는 힘없는 일선의 영어 교사가 비난을 감수하는 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런 부당함은 조금만 생각해도 명확해질, 누구나 바로 찾을 수 있는 논리적 오류를 안다면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구차한 변명일 수도 있다. 평생 영어 교사로 일했으니 팔이 안으로 굽는 것 아니냐고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부당한 Bashing이 이러이러해서 부당하다고 밝혀야 한다. 잘못한 게 아닌 일로 비난을 받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일부 언론의 영어 교사 Bashing이 정점을 지나고 얼마 뒤 약 3주간 진행된 교사 연수를 받으러..

# Bashing 1

Bashing is a harsh, gratuitous, prejudicial attack on a person, group, or subject. Literally, bashing is a term meaning to hit or assault, but when it is used as a suffix, or in conjunction with a noun indicating the subject being attacked, it is normally used to imply that the act is motivated by bigotry. - Wikipedia Bashing은 사람, 그룹 또는 주제에 대한 가혹하고 무자비하며 편견에 찬 공격이다. 글자 그대로 하면, Bashing은 때리거나 폭행하는..

# 1등의 비결

20대 후반, 첫 교직을 은평구 C고등학교에서 시작했다. 학년당 15 학급, 3개 학년 전체 45 학급으로 규모가 꽤 큰 데다 학급당 학생 수가 60명에 육박했으므로 교정은 어디나 북적거렸다. 요즘이야 직장 내 메신저로 웬만한 사항은 다 알릴 수 있어서 전체 교직원 회의를 한 달에 겨우 두어 번 하지만 당시엔 거의 매일 아침 회의가 열렸다. (실상 회의라고는 할 수 없는,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전달과 요구가 다였다. 의견 개진이나 찬반 토론이 없는 '이름만 회의'는 지금도 대부분의 학교에서 여전히 열리고 있다.) 회의 내용 중에는 어느 학급의 모의고사 성적이 제일 향상되었다는 둥 경쟁심을 부추기는 것도 있었는데, 수학을 가르치는 L선생님은 거의 언제나 칭찬의 주인공이었다. 그 학급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무단..

# 의대가 뭐라고

내가 근무했던 학교는 K대학교를 비롯해 의료원, 남/여고, 남/여중, 초등학교, 유치원으로 이루어진 학교법인에 소속되었다. 매년 수능고사 직후엔 대학별 논술고사가 이어지고, 같은 재단에 속한 학교의 교직원들은 K대학교의 논술 고사에 감독으로 차출된다. 그 해에도 예년처럼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시험 감독을 했는데, 무작위로 감독 배정이 되기 때문에 매번 다양한 학부/학과의 수험생을 경험한다. 그날 나는 의예과 지원자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의예과 수험생들... 장차 의사가 되어 생명을 구하거나 의과학자가 되어 의술의 발전에 이바지할 사람들이 아닌가. 자연계열의 최우등생이라면 의대를 지원하는 게 당연시되는 시대니 의예과 논술고사를 보러 온 아이들은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공부의 신'이라 할만하다. 내가 ..

# 한나절 땡볕

옛날 어른들은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두 달이라도 먼저 태어난 녀석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햐~! 한나절 땡볕이 다르긴 다르네." 유아기에는 확실히 한두 달 차이가 크다. 한나절만 더 땡볕을 쬐어도 차이가 난다고 농을 섞어 과장을 했는데, 어느 정도 크고 나면 한두 달 차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마련이다. 그럼 고등학생의 '1년 땡볕'은 어떨까. 지리과 K선생님은 처음 뵈었을 때 이미 머리가 정수리 너머까지 벗어진, 그야말로 '완벽한 대머리'셨다. 수년간 같이 근무하며 그 모습에 낯이 익어버렸는데 정년이 다 되신 마당에 가발을 새로 맞춰 쓰신 거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표현하기가 민망하면 사람들은 그냥 조심스러운 인사치레만 한다. 적당히 모른 척하는 게 예의라는 것 정도는 알기 때문..

# 교사가 뭘 안다고...

살면서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니이~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잘 아는데도 (건방지게) 나보다 더 잘 아는 척하는 사람에게나 내지르는 말이다. 이런 훈계조 다음엔 친절하고 논리 넘치는 교정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오래전 일이다. 학교 동창들을 만나고 온 아내는 모임에서 황당한 말을 들었다며 혀를 찼다. 아내는 당시 근처 중학교 교사였고, 이미 20년 가까이 수많은 아이들의 다양한 모습과 현장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고 있던 참이었다. 친구들이 만나서 하는 얘기의 주제는 대략의 분류가 가능하다. 20대엔 학업, 연애, 취업, 결혼, 30대에는 직장, 결혼, 출산, 육아, 주거, 40대가 되면 직장, 주거, 자녀 교육 등의 범주에서 얘깃거리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50대엔... 회고해 보니 초반엔 입시,..

# 완벽한 세상, 완전한 교사

매년 교육실습생들이 온다. 그 시기가 꽃이 피고 새가 울어 덩달아 우리의 마음도 싱숭생숭해지는 4~5월이다. 가뜩이나 갑갑한 학교가 싫은 아이들은 그냥 누군가가 새로 온다는 소식에도 마냥 신난다. 이렇게 교생들이 오면 (각 잡히고 진지해야만 할 것 같은) 면학 분위기가 흐려지기 마련이라, 대학 입시에 목매는 대개의 인문계 고등학교 중엔 교생을 아예 받지 않는 곳도 있다. 하지만 우리 학교처럼 무슨 부속이니 병설이니 하면서 대학교 재단에 속해있으면 관례상 교생을 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매년 같은 캠퍼스 안의 K대학교를 비롯해 주변 H외대, K대학교 등의 교생들을 받아 한 달간 실습을 시킨다. 과목이나 담임 여부에 따라 교사 한 명이 교생 한두 명을 지도하는데, 4주간의 과정이 끝나면 그간의 수고에 ..

# 칭기즈칸의 중국 음식점

19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남자고등학교의 수업 분위기는 군대와 닮아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혹한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데다 군사 독재의 찬바람으로 사회가 경직되었으니, 학교라고 이런 분위기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게다가 (선생님마다 스타일과 무서움의 정도는 달랐지만) 남자만 있는 집단에선 군내나 학교나 할 것 없이 강압적인 명령/지휘/지도에 복종하는 게 규칙이자 법이었다. 내 몸인데도 허락 없이 움직일 자유는 없었다. 수업 중 화장실에 가기는커녕 옆 사람과 잡담을 하다가 걸리면 체벌을 각오해야 했다. 지루한 수업 중 선생님이 분위기 전환용으로 간혹 썰렁한 여담이라도 해야 '허가받은 시시덕거림'으로 잠시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신입생들은 처음엔 남자고등학교의 '냉기'에 잔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