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른들은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한두 달이라도 먼저 태어난 녀석을 보며 이렇게 말했다.
"햐~! 한나절 땡볕이 다르긴 다르네."
유아기에는 확실히 한두 달 차이가 크다. 한나절만 더 땡볕을 쬐어도 차이가 난다고 농을 섞어 과장을 했는데, 어느 정도 크고 나면 한두 달 차이는 거의 눈에 띄지 않기 마련이다. 그럼 고등학생의 '1년 땡볕'은 어떨까.
지리과 K선생님은 처음 뵈었을 때 이미 머리가 정수리 너머까지 벗어진, 그야말로 '완벽한 대머리'셨다. 수년간 같이 근무하며 그 모습에 낯이 익어버렸는데 정년이 다 되신 마당에 가발을 새로 맞춰 쓰신 거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표현하기가 민망하면 사람들은 그냥 조심스러운 인사치레만 한다. 적당히 모른 척하는 게 예의라는 것 정도는 알기 때문에 별 파문(?) 없이 새 가발은 분위기에 스며들어 안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사회성이 '마~이' 부족한 10대 아이들이 가발 쓴 선생님을 처음 대하는 장면에서 문제가 터졌다. 당시 학급 당 학생 수에 따라 선생님 1명과 학생 50명이라는 절대적인 수적 우위에서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면 아이들이 '갑'이 되기 십상이었다. 어느 술자리에서 불콰해진 K선생님과 나와의 대화는 이랬다.
"김선생, 내가 가발을 쓰고 교실에 들어갔잖우. 그런데 가발 쓴 걸 처음 본 애들 반응이 어땠는지 알아? 잘 들어봐. 3학년 놈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크게 웃지도 못하고 숨을 참으며 쿡쿡 킥킥 욱욱거려. 서로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삼키느라 볼때기가 다 불룩해지는 거야. 내가 창피해할까 봐 지들도 차마 입 벌리고 웃지는 않는 거지."
"하핫. 그래도 3학년이라고, 선생님이 민망해하실까 봐 나름대로 참긴 했군요."
"2학년 놈들은 어땠게?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 깔깔 낄낄 흐흐 소리를 내면서 즐거워 죽을 지경이더군. 그거 보면 3학년 놈들은 확실히 더 어른스러운 거지."
"그래요? 2학년들은 좀 더 커야 하겠네요."
"근데 1학년 놈들은, 내참 하여간... 문 열고 들어가자마자 아주 난리가 났어. 박장대소에 책상을 치고 소리를 막 지르는 거야. 뭐, 그럴 수 있지 아직 철부지 어린놈들이니까."
"우하핫! 1학년 애들이 그렇죠 뭐. 역시 2, 3학년이 세상을 더 살았다고 다르긴 하네요."
"그러게 한나절 땡볕이 어딘가. 그런데 그 1학년 중에서도 되게 이상한 놈이 있더구먼. 1학년 교실 어디를 들어가도 똑같이 손뼉 치며 웃고 난리였는데, O반에 들어갔더니 어떤 놈이 글쎄 갑자기... 그것도 큰 소리로 질문을 하는 거야. 나참, 그 망할 놈이..."
"뭐라고 물었는데요?"
"와하하하! 히히히히! 그런데요 선생니~임, 그 가발 얼마예요?"
정말로 한나절 땡볕은 다르다. (또) 옛말 틀린 것 없다.
'학교란 무엇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날로 먹기 (0) | 2022.08.07 |
---|---|
# 의대가 뭐라고 (0) | 2022.03.26 |
# 교사가 뭘 안다고... (0) | 2022.03.25 |
# 완벽한 세상, 완전한 교사 (2) | 2022.03.12 |
# 칭기즈칸의 중국 음식점 (2) | 2022.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