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엇인가

# Bashing 1

볕좋은마당 2023. 2. 12. 23:09

Bashing is a harsh, gratuitous, prejudicial attack on a person, group, or subject. Literally, bashing is a term meaning to hit or assault, but when it is used as a suffix, or in conjunction with a noun indicating the subject being attacked, it is normally used to imply that the act is motivated by bigotry. - Wikipedia

Bashing은 사람, 그룹 또는 주제에 대한 가혹하고 무자비하며 편견에 찬 공격이다. 글자 그대로 하면, Bashing은 때리거나 폭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접미사로 또는 공격받는 대상을 나타내는 명사와 함께 사용되면 일반적으로 행위가 편견에 의해 유발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데 쓰인다. - 위키 백과

타자를 혐오하고 비난함으로써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려는 욕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요즘 들어 장애인이나 약자, 성적 소수자, 또는 정치적이나 종교적으로 자신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Bashing도 늘어난 듯하다. 군사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억눌렸던 표현의 자유가 꽃피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때였다면 불가능했던 온갖 주장과 잡설이 공기처럼 흩어지기에 Bashing이 더 돋보이는 건지도 모른다.

뒷담화 – 옛날에 술자리에서 킬킬대며 '뒷다마'라고 하던 걸 좀 '있어 보이게' 바꾼 말이다 – 가 인류 진화의 원동력이었다느니 언어 발전의 기폭제였다느니 하는 고매한 이론들도 있는데 아무려면 어떤가, 사람은 둘만 마주 앉아도 남의 흉을 본다. 가벼운 흉보기로 시작했다가 '삘' 받으면 글자 그대로 Bashing의 수준으로 한달음에 가버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심한 흉보기인지 Bashing인지의 애매함은 있을지언정 험담이란 언제 어디서나 쏠쏠한 재미도 주기에 '현장범'들을 결속하는 효과는 매우 크다!

 

그런데 여기까지여야 한다. 뒷담화건 Bashing이건 사인(私人)들의 대화는 그 자리에서 휘발해 버리므로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내거나 사회적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문제는 스스로 우리 사회를 이끌고 여론을 만든다(고 착각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다. 기자나 데스크가 일시적으로 편협한 사고의 틀에 사로잡힐 수는 있다. 그들도 결국 불완전한 인간이지 않은가. 하지만 함부로 다루어도 반박할 힘이 없고, 그래서 자신에게 맞설만한 능력이 없다는 걸 알아보고 그 대상에게 Bashing을 일삼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간혹 그런 Bashing을 통해 자사의 경제적 이익을 탐한 건 아닐까 의심이 드는 사례도 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둔 시점이었던 것 같다. 대대적인 화장실 개선 운동과 더불어 유난한 관심의 대상이 된 분야는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영어 실력이었다. 엄밀히 말해 우리 국민들의 전반적인 '영어 실력'이 아니라 '영어 회화 능력'에 비판의 화살이 집중되었다. 날만 새면 '10년을 영어 공부하고도 외국인 앞에선 한 마디도 못해...' 류의 한탄이 신문과 방송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겠다는 듯 TV 방송사들은 앞다투어 특집을 편성하기도 했다.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아마도 재미교포였을 쏘O라는 여성 리포터가 출근 시간에 혜화역 출구를 나서던 아무나 붙잡고 다짜고짜 영어로 질문을 해댔다. 백이면 아흔아홉은 느닷없이 들이대는 방송사 카메라를 보고는 내빼느라 바빴고, 운 나쁘게 잡힌 사람은 일상적인 인사말 정도였음에도 영어로 즉답을 하지 했다. 몹시 당황한 얼굴로 버벅대거나 리포터를 뿌리치고 줄행랑치는 장면이 전국으로, 그것도 아침 시간에 생방송으로 나갔다. 올림픽을 앞두고 외국인에게 길 안내라도 하려면 영어 한 마디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냐는 게 프로그램의 취지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그렇게 얼굴을 드러낸 채 수모를 겪게 했다면 당장 방송국을 고소하고도 남을 문제였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당시 방송들은 영어 회화에 대해 가졌던 사람들의 좌절을 상처 후벼 파듯 했다. 단시간에 끌어올리기도 힘든 회화 능력을 한탄하는 분위기는 90년대에도 이어졌고, 비난의 화살은 돌고 돌아 애먼 중고등학교로 쏟아졌다. 해오던 대로 열심히 한 것뿐인데 학교의 영어 교육은 졸지에 욕을 먹기 시작했고, 결과적으로 대입 수능고사에 포함된 듣기 평가 문항 수가 늘어나는 효과를 낳았다. 문법과 독해에 치중했던 종전의 영어 수업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카세트테이프를 앞뒤로 감으며, 훗날 기기의 발전에 따라 점차 CD 플레이어로, 노트북으로, 태블릿 PC로 옮겨가는 듣기 연습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수능고사에 영어 듣기가 생기기 전에도 듣기 평가 등을 통해 학교 현장에서 듣기 훈련을 하라는 교육청의 권유와 압력은 늘 있었다. 소위 '진짜 써먹을 수 있는 영어'인 회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데 누구도 토를 달지는 않겠지만 이런 주장은 학교의 실정을 모르(는 척하)는 한가한 소리에 불과했다. 당장의 입시에 목을 매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누가 '외국인과 당당하게 대화할 수 있는' 국민을 양성하겠다고 나설 것인가. 과연 그런 목표를 위해 독해 문제 풀이를 양보하고 두 명씩 짝을 맞춰 회화 연습을 시키는 교사를 그냥 둘 교장이 있다고 믿는 걸까.

당국의 압력과 사회적 비난에도 학교 현장이 바뀌지 않자 결국 입시와 직결되는 수능 고사에 듣기 점수가 할애되었고, 학교는 등 떠밀리듯 수업 시간에 영어 듣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을 거창하게 Washback Effect(역류효과)라고 하는데, 단순하게 줄이면 평가가 학습에 영향을 미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아무리 '수업 시간에 해라'고 다그쳐도 온갖 핑계와 현실을 들먹이며 버티다 '수능고사에 나온다'고 하니까 난데없는 실천력이 무섭게 돋아난 형국이 된 거다. 1994학년도 수능고사에서 전체 50 문항 중 8개로 시작한 영어 듣기 평가가 점차 강조되어 현재는 전체 45문항 중 17개가 되었는데, 수치만으로도 영어 듣기 능력 향상을 위한 교육 당국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조치와 효과 덕에 학창 시절 문법과 독해에만 집중했던 50대 이상 세대와는 달리 요즘 세대의 영어 듣기 능력은 확실히 좋아졌다. 이와 더불어 영어 말하기 능력이 좋은 아이들도 많아졌는데 이는 학교의 정규수업보다는 사교육 덕일 가능성이 많다.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여건상 고등학교에서 영어 말하기 수업을 진행하기는 역부족이다. 목전에 닥친 수능고사의 대부분은 허겁지겁 읽고 답을 택해야만 하는 독해 분야가 아닌가.

다시 Bashing 얘기로 돌아가자. 한국형 영어능력 검증시험인 TEPS(Test of English Proficiency developed by Seoul National University) 시행 초기의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구글링 해보니 조금씩 이견이 있긴 하지만 TEPS는 1999년 서울대 언어교육원이 개발하고 자칭 '여론을 만드는' C일보가 시행하였다. 다음은 TEPS가 나오기 전후 C일보의 기사(일부)들을 모아본 것이다. 구글링으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문법과 단어 공부에 열심인지 몰라요. 달달 외우는 일밖에 하지 않거든요. 그래서 영문법 실력은 저보다 나은 것 같은데, 실제 대화는 전혀 되질 않습니다." 삼성전자 인사팀에 근무하는 미국인 샌디 오버비(28. 여) 대리는"한국인들은 진짜 부지런하고 성실하지만, 영어공부 방법이 잘못돼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너무 부족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토익점수가 7백 점이 넘어도 말 한마디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점수는 낮아도 의사소통이 잘되는 직원이 있어요. 한국기업들은 토익 점수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데, 무엇보다 외국인들과 자주 접촉하려는 적극성이 중요합니다." - 1995년 7월 중학교에서 대학교까지 정규 교육 10년, 10년 입사시험, 직장생활…. 일반인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어에 들인 땀과 시간, 돈은 엄청나다. 그래도 대부분 사람들이 「영어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쩌다 외국사람을 만날라치면 손에 땀부터 난다. 『영어 반벙어리면 취직도, 승진도 어렵다』는 강박감에 이 학원, 이 교재 기웃거리지만 결국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 1996년 5월

[포커스] TEPS에는 영어가 살아 숨쉰다
우리나라 영어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영어를 못하도록 조직적으로 방해해온 과정'이라는 혹평을 들을 정도로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10년 이상 영어를 배워 놓고도 정작 외국인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고, 학교 밖에서 다시 영어 학습에 나서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중략)
TEPS는 서울대 어학연구소가 개발하고 조선일보사와 디지틀조선일보가 시행하는 새로운 형식의 영어 능력 평가시험. 외국에서 개발된 기존의 영어능력 평가시험보다 수험자의 실력에 대한 진단이 자세하고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기존 영어능력 평가시험에 쏟아붓던 막대한 외화도 절약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 1999년 1월

자, Bashing의 대상이 무엇인지 좁혀보자. '10년을 배워도 외국인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는' 영어 수업을 비난하고 있다. 조금 넓히면 그런 식으로 영어 수업을 하는 교사와 학교, 제도를 Bashing하고 있다. (나는 이런 언론의 비난 대상이 된 채 열심히 출퇴근하고 있었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비난을 받을 만큼 제대로 된 교육을 하지 않았다고 치자. 그러면 제도와 정책을 바꿔서 학교 수업 시간에 영어 회화 교육을 하자고 제안하면 될 것 아닌가.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의 여론을 만든다며 영향력을 자랑하는 신문인데 학교 수업을 바꾸는 제도의 개선을 요구하든가, 그게 어려우면 Washback 효과를 노려서 대입에서 영어 말하기 능력을 포함시키라고 하면 되지 않았을까. 당장 정부가 알아듣고 대입 제도를 바꾸면 학교는 어쩔 수 없이 영어 수업을 방식을 바꿀 테고, 그러면 크게 힘 안 들이고도 우리 국민의 회화 능력이 쑥쑥 올라갔을 텐데. 아, 이런! 몰라봤다. 그 위대한 신문사는 당장 영어 수업 시간에 말하기 훈련을 할 수 없는 현장을 너무나 잘 이해했거나, 대입 수능시험에서 객관적으로 말하기를 평가하는 방법을 마련하는 데 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현실에 너무나 큰 배려심을 발휘했던 것이다. 몰라봐서 정말 쏘리!

여기서부터는 (근거는 찾기 힘든, 나의 뇌피셜로 말하는) 대충의 상황 설명이다. 당시 야심 차게 시작하는 TEPS의 성공을 위해 시행사인 C일보는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언론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바닥인 우리나라에서 사리사욕을 멀리하고 공공의 이익에 종사하는 신문사가 얼마나 될까만은, 적어도 그땐 지금보다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기가 쉬웠으니 대부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대략 그림이 그려지지 않은가? Bashing의 결과로 이익을 보는 건 누구였는가? 물론 우리 국민이었을 수도 있다. '10년을 영어 공부하고도 외국인 앞에선 입도 벙긋 못'하다가 이젠 제법 유창한 영어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러나 공교육 안에서 그런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돈 벌려고 들어갈 직장의 요구에 맞추려면 어쩔 수 없이 자기 돈을 써서 '실용 영어' 능력을 키워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TEPS 점수를 받으려 공부하거나 회화 학원을 다니는 사람들에게 누구를 원망하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자신을 이렇게 만든 건 10년간의 '빌어먹을' 영어 교육이었고, 그 때문에 적지 않은 돈을 들여 학원을 다녀야 했으며 그렇게 늘어난 '진짜 영어'로 당당하게 받은 TEPS 점수를 기업에 제시하여 합격을 했을 테다. 역시 학교 영어 수업은 입시만을 위한 쓸데없는 시간 낭비였고, TEPS가 없었다면 '진짜 영어'를 연마할 기회는 없었을 테다. 많은 사람이 이런 생각을 하면 살았을 것이다. '돈은 좀 들었어도 영어를 새롭게 배우게 되었다. 구직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이런 고생은 나의 대에서 끝냈으면 좋겠다, 그러므로 내 자식은 어릴 때부터 영어 유치원으로 시작해서 온갖 회화 코스를 경험하게 하겠다, 학교에선 이런 교육을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돈은 누가 벌었는가? 시도 때도 없이 '영어 교육 Bashing'을 해대던 신문사가 한국형 영어 능력 시험 성공으로 돈을 벌게 된다는 그림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이런 Bashing과 쌍끌이로 TEPS를 개발했고, 누군가는 짭짤한 수입이 생겼을 것이다.

에이, 그런 상상은 너무 나간 것 아닐까. 그렇다면 좋은 면만 보자. TEPS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회화 능력을 끌어올리지 않았는가. 이 좋은 일에 공교육이 철저하게 배제된 건 어쩔 수 없지만 사기업인 언론사와 그에 협력한 국립대의 돋보이는 노력은 칭찬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좋고 나쁘고를 떠나 단순하게 결산하면, S대와 C일보는 돈을 벌었고 구직자들은 돈을 쓴 만큼 '진짜 영어' 실력을 늘렸다. 그 와중에 학교는... Bashing의 영원한 피해자로 남았다.

(# Bashing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