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엇인가

# 교사가 뭘 안다고...

볕좋은마당 2022. 3. 25. 11:59

살면서 이런 말을 할 때가 있다.

 

'니이~가 뭘 안다고 그래!'

 

내가 잘 아는데도 (건방지게) 나보다 더 잘 아는 척하는 사람에게나 내지르는 말이다. 이런 훈계조 다음엔 친절하고 논리 넘치는 교정이 이어지기 마련이다.

 

오래전 일이다. 학교 동창들을 만나고 온 아내는 모임에서 황당한 말을 들었다며 혀를 찼다. 아내는 당시 근처 중학교 교사였고, 이미 20년 가까이 수많은 아이들의 다양한 모습과 현장의 변화를 온몸으로 겪고 있던 참이었다.

 

친구들이 만나서 하는 얘기의 주제는 대략의 분류가 가능하다. 20대엔 학업, 연애, 취업, 결혼, 30대에는 직장, 결혼, 출산, 육아, 주거, 40대가 되면 직장, 주거, 자녀 교육 등의 범주에서 얘깃거리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50대엔... 회고해 보니 초반엔 입시, 주거, 정치 등이 화제였다가 후반으로 가면서 슬슬 노부모의 건강과 돌봄, 자신의 건강과 퇴직 또는 퇴직 후의 계획 등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아내는 40대였고, 친구들의 수다에는 자녀 교육 문제가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 중학생이거나 중학교 진학을 앞둔 아이들의 엄마였으니 소리 없이 다가 오는 대학 입시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을 게다. 나름대로 터득한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거나 다른 이의 정보력에 감탄하며 뭐라도 얻어 가려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이런저런 좋은 점을 자랑하는 엄마도 물론 있었겠지만 학교의 흠을 들춰 이러쿵저러쿵하거나 담임의 흉을 보는 동시에 아이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일도 있었겠다. 원래 '뒷담화'란 칭찬보다는 흉보는 내용이 더 흔하므로 수다의 대부분이 학교에 대한 험담인 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문제는 대부분 평범한 주부들 사이에 현직 교사인 아내가 끼어 있었다는 거다. 친구들은 역시나 중학생인 자녀 교육 문제로 이야기 꽃을 피웠고 급기야 건전한 비판인지 욕하는 건지 모를 말들을 뱉기 시작했다. 자기가 일하는 직종을 흉보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사리에 맞지도 않는, 어디서 주워들은 어설픈 정보만 갖고 비난하는 사람 앞에서는 누구라도 사실이 아닌 얘기를 바로잡고 싶지 않겠는가. 직업의 귀천을 넘어 자신의 존엄이 부정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는 거다. 아무리 불만이 있는 직장이라도 바깥사람들이 함부로 말한다면 내일도 그 직장에 출근해야 하는 사람의 가슴에선 당장 열불이 나기 마련이다. 친구들이 터무니 없이 하는 학교를 흉보는 앞에서 아내가 느꼈을 감정이 이와 비슷했을 것이다.

 

동창들은 저마다 자기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 얘기, 고등학교 진학에 대한 얘기 등을 했다. 한 친구가 자신의 정보력을 과시하며 중학교 진학 전엔 OO를 '마스터'시켜야 하고 (어떤 일을 죽기 전에 '마스터'한다는 게 가능하긴 한가!) 중1 때는 OO 학원을 보내야 하며 중2 때는 OO 과목에 집중해야 한다는 등 목에 힘주며 말했다. 듣고 있던 일행은 맞장구를 쳤고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학교만 믿고 넋 놓고 있으면 아이의 미래를 망치게 된다는 둥, 늦어도 언제까지는 3학년 과정까지 학원에서 '마스터'해야 한다는 둥, 별 얘기가 다 있었다. 부모들은 이토록 힘들게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는데 도대체 학교가 해주는 건 뭐냐며 모임은 학교 성토장으로 바뀌어갔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용히 듣고만 있던 아내가 결국 입을 열었다.

 

"얘들아, 그런데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부모들이 잘 모르는 것도 있어. 너희들 얘기처럼 학교가 OO를 안 해주거나 OO를 안 가르치는 게 아니야. 학교도 잘 짜여 돌아가는 시스템인데 설마 해야 할 일을 안 하는 게 가능할까? 아이들이 집에서 하는 얘기를 100% 믿는 것도 안 좋아. 아이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얘기만 골라하거든. 학원도 잘 이용하면 물론 좋지. 하지만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엄청 많이 배운 것 같아도 그게 허상인 경우도 있어. 앉아서 강의를 듣는 것과 자기 것으로 소화하는 건 또 다른 문제거든. 그리고 너희들이 말하는 OO라는 게 사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완전히 오해일 수도 있어. 내가 중학교에 있는 게 몇 년인데, 그리고 매일 보는 아이들이 몇 명인데... 실제로 현장에서 겪는 일이니까 참고하라고 말해주는 거야. (후략)"

 

현직 교사가 사실을 '교정'해 주고 경험에서 나온 조언을 주면 사람들은 대부분 고개를 끄덕인다. 교사는 학원을 옹호하거나 비난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아이들의 학업에 도움이 된다면 찬성이고, 그렇다면 서로의 조건과 이익이 충돌하지 않으니 말이다. 학원의 얘기에만 귀 기울이지 말고 학교 쪽 말도 들어봐야 확증 편향에 빠질 위험에서 안전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한다. 아내가 힘들게 꺼낸, 경험 많은 교사로서 해준 조언은 바로 뒤따라 나온 친구의 확신에 찬 말에 갈 곳을 잃고 만다

 

"야, 넌 좀 조용히 해. 니이~가 뭘 안다고 그래!"

 

으헛! 이 기상을 보라. 역시 우리는 만주 벌판을 달리던 고구려인의 후예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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