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 남자고등학교의 수업 분위기는 군대와 닮아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혹한 식민지와 전쟁을 겪은데다 군사 독재의 찬바람으로 사회가 경직되었으니, 학교라고 이런 분위기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게다가 (선생님마다 스타일과 무서움의 정도는 달랐지만) 남자만 있는 집단에선 군내나 학교나 할 것 없이 강압적인 명령/지휘/지도에 복종하는 게 규칙이자 법이었다. 내 몸인데도 허락 없이 움직일 자유는 없었다. 수업 중 화장실에 가기는커녕 옆 사람과 잡담을 하다가 걸리면 체벌을 각오해야 했다. 지루한 수업 중 선생님이 분위기 전환용으로 간혹 썰렁한 여담이라도 해야 '허가받은 시시덕거림'으로 잠시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신입생들은 처음엔 남자고등학교의 '냉기'에 잔뜩 쫄아있기 일쑤였다. 학교와 급우들이 익숙해지고 분위기에 적응하기 시작하던 어느 날의 1학년 수업 시간이었다. 작은 체구에 틈만 나면 시시덕거릴 준비가 된, 명랑하고 똘똘한 ‘시O훈’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30년도 더 된 지금도 이름이 또렷이 기억나는 이유는 '시'씨라는 희성(稀姓) 때문이다. 그 이후로 그런 성씨를 한 번도 보지 못 했다면 정말 희귀하다는 증거다. 희성 하니까 생각난 건데, 고등학교 시절에 알게 된 '궉(鴌)'씨도 있다. 친구들과 그런 성이 있느니 없느니 내기까지 했다. 존재를 증명하겠다고 기어코 '鴌OO'라는 문패가 달린 집 대문 앞까지 데려가 확인시킨 적은 있지만 그 성을 쓰는 사람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시'씨도 그 정도로 희성이긴 하지만 적어도 1년간 장본인 얼굴을 보고 가르친 경우라 그 녀석은 기억에서 사라질 수가 없다.
그날은 교실 어디에서부턴가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서서히 키득거림이 옮아가는 것 같았다. '어떤 놈들이 수업 중에 또 딴짓을...' 하는 생각에 설명을 하면서도 나의 눈과 귀는 범인 색출에 분주했다. 키득키득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안 웃는 척하는 녀석들을 열심히 추적하다가 드디어 한 아이를 특정했고, 그게 바로 '시O훈'이었다.
"야, 시O훈, 뭘 숨기고 있는 거야? 이리 내놔!"
서서히 옮아가던 키득거림의 원인은 바로 꼬깃꼬깃 접힌 종이 한 조각이었다. 자기들끼리 앞으로 옆으로 종이조각을 내 눈을 피해 전달하고 읽으며 킬킬거렸던 것이다. 범인 색출에 성공한 나는 의기양양하여 종이를 빼앗아 펴 들었고, 수업 시간에 딴청 피운 녀석들을 어떻게 혼내줄까 궁리를 하던 내 눈에 들어온 건 누군가가 휘갈겨 쓴 퀴즈였다.
Q: 칭기즈칸이 만든 짜장면집 이름은?
당시 선생님들은 엄하고 무서우며 카리스마가 넘쳐야만 하는 존재였고 학생들은 수동적이고 주눅 든 이미지 속에서 살아야 했다. 그러니 수업 중 발견한 난센스 퀴즈가 아무리 웃겨도 (근엄해야 할) 교사가 학생들 앞에서 박장대소하는 모습은 어쩐지 바람직하지 않은 그림이었다. 그래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다. 뭔가 재미있는 답일 것 같아서 권위고 분위기고 뭐고를 세워야 한다는 의지가 사라져 버렸다.
"야, 그런데... 이거 정답이 뭐야?"
수업 중 작은 일탈이 적발되었지만 언제나 쾌활하던 시O훈은 이렇게 답했다.
"몽고반점이요."
순간 나는 이미 쿡쿡 삐져나오던 웃음소리를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느라 애썼고, 생글거리던 시O훈은 수업 분위기를 저해한 모든 죄를 용서받는 행운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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