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엇인가

# 1등의 비결

볕좋은마당 2022. 8. 10. 21:36

20대 후반, 첫 교직을 은평구 C고등학교에서 시작했다. 학년당 15 학급, 3개 학년 전체 45 학급으로 규모가 꽤 큰 데다 학급당 학생 수가 60명에 육박했으므로 교정은 어디나 북적거렸다. 요즘이야 직장 내 메신저로 웬만한 사항은 다 알릴 수 있어서 전체 교직원 회의를 한 달에 겨우 두어 번 하지만 당시엔 거의 매일 아침 회의가 열렸다. (실상 회의라고는 할 수 없는, 위로부터의 일방적인 전달과 요구가 다였다. 의견 개진이나 찬반 토론이 없는 '이름만 회의'는 지금도 대부분의 학교에서 여전히 열리고 있다.)

회의 내용 중에는 어느 학급의 모의고사 성적이 제일 향상되었다는 둥 경쟁심을 부추기는 것도 있었는데, 수학을 가르치는 L선생님은 거의 언제나 칭찬의 주인공이었다. 그 학급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무단결석자는 물론 지각이나 조퇴 건도 찾아볼 수 없는,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모범 학급'이었다. 웬만한 학급에선 꿈도 못 꿀 정도로 깨끗한 출석부에 성적까지 좋으니 교장 교감의 눈에는 얼마나 흡족한 일이었을까.

그렇다고 L선생님이 우락부락한 성격이거나 압도적인 체격의 소유자라 남성호르몬이 분출하는 아이들을 주눅이라도 들게 했다면 이해될 일이었다. 안경 쓴 샌님 인상에 독실한 기독교인인 선생님의 목소리와 어조는 완전 '전도사 삘'이었으니, 도대체 그분에게 무슨 비결이 있어서 매년 맡는 학급마다 아이들을 그렇게 휘어잡을까.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한 미스테리였다. 다른 선생님들은 상담도 하고 윽박지르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담임 반의 군기를 잡아 보려 했지만 L선생님의 학급은 끝끝내 '넘사벽'의 경지였던 것이다.

모든 이들은 그 비결을 그분의 상담 모습에서 찾았다. 교무실로 아이를 불러 앉히고 의례적인 상담을 하는 다른 교사들의 눈에는 틈틈이 교정의 벤치에 아이와 함께 앉아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는 L선생님의 모습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교사와 학생이 뻣뻣한 얼굴로 어색하게 마주하는 상담 장면과 달리 학생의 목을 한 팔로 감싸 안은 채 머리를 숙이고 얘기하는 모습이란 멀리서 봐도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자기 학급의 한 명 한 명을 일일이 불러 양지바른 벤치에서 상담하는 수고를 했으니 그 반이 학교에서 최고가 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더 대단한 건 L선생님이 담임을 했던 아이들은 (아무리 거칠던 녀석이라도) 1년간 '교화'가 되기 때문에 상급 학년으로 올라갔을 땐 순한 양이 되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학급 출신은 모두 표가 난다고 했다. 역시 어깨를 감싸고 얼굴을 맞댄 밀착 상담의 위력은 탁월했다!

얘기가 여기서 끝이었다면... 하나도 재미 없을 거다. 어느 날 상담의 진실이 드러나버린 사건이 생겼다. 영어과 C선생님은 늘 그 '비기'가 궁금했지만 알아볼 기회가 닿질 않았다. 굳이 교무실에서 먼 벤치에까지 가서 심각하게 학생 상담을 하는데, 가까이 가서 대놓고 관찰하는 건 실례가 아닌가. 그렇게 누구도 진실을 모르는 채 상담의 결실만을 부러워하기만 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그 옆을 지나던 C선생님은 먼발치가 아닌 가까이서 실상을 접하고는 '엽기적'이라고 할 만한 얘기를 우리에게 털어놓았다. 예상치 못한 목격담은 모두를 깊은 깨달음과, 충격과, 의문 해소와, 폭소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뺨을 맞대고, 다정하게 어깨를 껴안고,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고, 조곤조곤... 하던 상담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고 한다. (방송윤리심의위원회의 심사를 통과 못 할 욕설 부분은 '삐~' 처리함)

"야 이 삐~팔놈아! 내가 우리 반 지나면서 보니까 너 수업 시간에 졸던데, 이 개삐~끼야. 나한테 한번 뒈지게 맞고 죽어 볼래, 이 삐~팔놈이... 또 한 번 내 눈에 띄면 그땐 아주 대가리를 삐~살을 내버리든가 귀삐~대기 한 20대 맞을 줄 알아라, 이 10 새삐~야. 알아 들었니 이 모자란 삐~끼야!"

더 이상 묘사하기엔 너무 강력하고 황당해서... 후략하기로 한다. 세상엔 겉만으로 판단하면 안 될 일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