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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매치기 당한 썰

볕좋은마당 2024. 3. 25. 07:29

아직 쌀쌀한 3월 13일, 프랑스로 날아왔다. 파리에서 지내다 영국 런던을 거쳐 며칠 전에 들어온 프랑스 제3의 도시 Lyon. 말로만 듣던, 유럽에서 소매치기 당한 ‘감흥’이 사라지기 전에 글을 남기기로 했다. (웬만해선 여행 중엔 글을 안 쓰려 했는데 빌어먹을 그 X들 땜시…)

외국 공항에 착륙하면 어김없이 폰에서 주르륵 뜨는 외교부의 안내 문자: ‘여행 시 소지품 도난, 마약 운반 및 소지, 야간 시간 도심 통행, 길거리 종교 집회 충돌…’ 치안이 너무나 좋은 나라의 국민에겐 크게 와닿지 않는 건조한 당부지만 소매치기 정도는 여러 인터넷 게시물이나 유튜브에서 조심하라고 하니 신경이 쓰이긴 했다.

지금까지 들어 본 주변의 외국 여행 경험담엔 온갖 경우가 다 있었다. 때로는 황당한 내용에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헛웃음을 참지 못하기도 했다.

어떤 직장 동료는 스페인에 도착하자마자 성당에 들어가 기도를 했는데 - 무사히 여행을 마치도록 빌었을 것이다 - 눈을 뜨니 옆에 놓은 가방이 사라졌다고 했다. 첫날부터 여권이고 카드고 다 잃었으니 그 후의 뒤죽박죽과 엉망진창은 상상 초월이란 말로는 부족할 거다. 학교 친구 하나는 프랑스 파리에서 차를 빌려 주차해 놓았는데 유리창이 박살나고 안의 가방을 도난 당했다고 했다.

조금 특이하고 심한 경우라서 당장 기억나는 건 이 정도 얘기들이다. 그래서 소매치기나 ‘눈탱이’ 같은 건 해외 여행에서 마주치는 자잘한 사건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 작년에 (누구나 조심하라는)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도 별일 없었으니, 외교부의 문자든 개인의 경험담이든 그냥 하는 당부려니 했다.

어차피 모든 세상 일이 ‘케바케’ 아닌가. 프랑스 사람들은 영어를 잘 해도 일부러 프랑스어로 대한다고도, 그게 아니라 실상은 영어를 못해서 그런다고도 들었다. 프랑스에서 지낸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이런저런 사람들을 겪어보니 역시 ‘케바케’가 맞는 것 같다. 영어 한 마디를 못 하는 젊은이가 있는가하면 원어민 같은 발음으로 유창하게 말하는 택시 기사도 있었다. 변두리 작은 가게에서 이방인의 질문에도 거침없이 영어로 답하고 안내하는 앳된 점원도 있었고, 그래도 호텔 직원인데 도무지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지껄이는 바람에 머리가 아픈 일도 있었다.

파리의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마침 런던에 머물다 왔는데 1주일 동안 비만 맞았다고 툴툴거렸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런던행 기차를 탔다. 그런데 웬걸? 며칠 내내 날씨만 좋았다. 하루 저녁 잠깐 부슬비를 맞았을 뿐… 그들에겐 런던은 칙칙한 동네, 우리에겐 온화하고 유쾌한 곳으로 남은 거다. 그러니까 봄은 ‘대체로’ 온화하고 겨울은 ‘대체로’ 춥다고 하듯 세상을 평할 때도 그렇게 하는 게 안전하겠다. 어쩌다 눈이 내리는 봄날도 만나고 봄처럼 따뜻한 겨울날도 있지 않은가.

저마다 겪는 장면과 장소, 시점이 모두 다르니 여행지에 대한 개인들의 소감이 간단한 몇 마디로 수렴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한국에서 평생을 살아도 한국은 어떤 나라며 한국인의 성격은 어떻다고 한 문장으로 줄이는 게 불가능한데, 몇 달도 못 살아 본 딴나라를 몇 마디로 정의하는 건 무모한 일이 아닐까. 이래서 온갖 호들갑으로 조회수를 올리는 유튜버들을 크게 신뢰하지 않기도 했다. 그건 그들의 경험일 뿐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얘기가 좀 샜다. 다시 소매치기로 돌아와서… 내일 마르세유로 떠날 예정이라 오늘은 트램을 타고 리옹의 이곳저곳을 다녀보기로 했다. T1 트램에서 내린 곳은 이 도시의 관문인 Gare Part-Dieu(빠흐디유역). 트램 T3로 갈아타려고 기다리는데 어떤 여자가 프랑스어로 ‘마구’ 말을 걸었다. 여기서는 T1만 가니까 기다려봐야 아무것도 안 온다는 얘기를 대충 눈치로 알아들었는데, 그러는 사이 트램이 도착했다. 분명히 T3를 타는 곳으로 알고 갔지만 하도 정신없이 얘기하니 어라, 지금 들어온 트램을 타야하는 건가? 마음이 그리로 쏠렸다. 마침 직전에 탔던 트램이 종점까지 안 가고 중간에 다 내리게 한 게 일요일이라 단축 운행을 한 탓이었다. 그래서 이쪽도 일요일의 변경 사항이 있나보다 했다.

우리 부부가 뻘쭘하게 서서 망설이는 동안 출발해야 할 트램은 문을 닫지 못했고 그 여자는 계속 우리에게 타라고 재촉하는… 이런 분위기가 결국 ‘시나리오’의 시작인 것이었던 것이었다. 이쯤 되면 계획엔 없었어도 문제의 트램을 타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출발한 트램 안에서도 그 여자는 또 트램 번호를 계속 지껄여댔고 ‘불어 알못’인 나는 겨우 T1의 불어 발음 정도만 알아들으며 무슨 소리인지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앞에 섰던 남자가 또 뭐라고 하는데 ‘너 차 표 있냐’로 이해했다. 어제에 이어 24시간 패스를 샀는데, ‘아니, 이놈이… 외국인이라고 날 의심하나?’하는 생각에 단호하게 표가 있다고 하는 순간 아내와 뒷사람들 한 무리가 뒤로 확 밀쳐졌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남자는 혹시 내가 소매치기를 당했나 주머니를 확인하라는 거였고, 아내 뒤에 붙은 여자들을 떨어뜨리려 밀어버린 거였다. 사람들이 밀려나며 잠깐 생긴 아내의 발 밑 공간엔 이름도 선명한 ‘대한민국 여권’이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황급히 여권을 집어올린 아내는 허리에 찬 파우치가 열려있고 카드 지갑과 돈 지갑이 없어진 사태에 놀라고 있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유럽의 소매치기인가…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나도 모르게 ‘여기 누가 도둑이야?‘라고 소리쳤다. 트램은 달리고 있었고, 사람들은 정적… 붐벼서 잘 보이진 않았으나 아까 나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잠깐 아내 뒤쪽을 갔다 오더니 없어진 카드 지갑과 돈 지갑을 갖다 줬다. 당황스러운 와중이지만 잃은 걸 받았으니 남자에게 고맙다고 했다. 욱하며 올라오는 깊은 빡침에 너희들 들으라고 ‘French pickpockets!’라고 크게 여러 번 소리쳤다. (그 앞에 마땅히 나와야 할 욕설은… 그래도 공공 장소라 생략했다. 한국인의 기상만 보여주는 걸로.)

워낙 순식간이라 도무지 뭐가 뭔지 정리가 되지 않았다. 일단 소매치기는 실패했고, 피해를 보진 않았어도 기분이 잡칠 대로 잡쳐서 시내를 둘러 볼 계획을 접었다. 숙소 근처에 와서 맥주를 마시며 천천히 사건을 복기했다.

1. 트램 정류장에서 어떤 여자가 계속 말을 걸어 결국 원치 않는 트램을 타게 됐는데, 그 안엔 이미 일당인 여자 두어 명이 타고 있었다.
2. 그 여자는 트램이 출발했는데도 하던 말을 이어가며 열심히 설명하는 ’친절‘을 베푸는 것 같았지만 어차피 서로 이해 못하는 언어의 분위기를 이용해 주의를 분산시킨 거다. 누구라도 호의가 넘치는 사람의 말에 온통 귀를 기울이지 않겠는가.
3. 그러는 사이 아내 뒤에 미리 서있던 한 패가 허리 앞쪽으로 맨 아내의 파우치를 열어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움큼 빼갔다.
4. 이를 안 남자가 그 X들을 뒤로 밀쳤고, 그 와중에 아내까지 밀려가며 일당이 놓친 여권이 바닥에 떨어졌다.
5. 내가 도둑이 있다고 소리치는 동안 남자가 뒤쪽으로 일당을 쫓아가 훔친 물건들을 빼앗아 아내에게 돌려줬다.

거꾸로 보면 정말 운이 좋은 날이었다. 돈은 얼마 안됐지만 카드고 여권이고 다 잃으면 그 후폭풍은 어쩌란 말인가. 당장 내일 떠나지도 못하고, 환불 불가로 예약한 기차며 숙소며… 어휴~. 마침 소매치기를 알아본 남자가 우릴 도왔고, 몇 초에 불과하지만 떠났던 물건들이 돌아왔으니 이런 행운이! 하필 우리가 소매치기단의 표적이 됐으나 하필 같은 칸에 그 X들을 알아챈 남자가 있었고 하필이면 범인이 여권을 떨어뜨렸고 하필 내가 소리쳤고 하필 그 남자가 범인을 찾아 물건들을 돌려준 거다. 그래서 황당하고 불쾌한 일 같아도 결과만 놓고 보면 억세게 운이 좋았던 것 아닌가. 위의 ‘케바케 이론‘에 대입하면 프랑스에선 소매치기를 당해도 다른 사람이 기꺼이 도와 물건을 잃지는 않는다는 ’썰‘도 가능하겠다.

이후 차분해지고 하나둘 기억이 살아나면서 이해 못할 부분이 마음 속에 옹이처럼 박혔다. 왜 그들을 잡지 않을까? 내가 계속 소리쳤고 남자는 외국인들을 상대로 나쁜 짓하는 X들에게서 지갑을 도로 빼앗아 왔고 트램 안에 가득한 사람들은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다 알고 있었다. 게다가 독 안에 든 쥐잖아? 모두들 놀란 건지 어쩐 건지 입을 꾹 닫고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게 다였다. 아니, 놀라고 당황한 건 우리가 더했으면 더했지 지들이 더했을까. 아마도 이런 광경이 일상이라서? 그래서 아무도 소매치기 일당을 잡지 않고 다음 역에서 내리도록 놔둔 건가? 마침 우리도 정신없이 다음 역에서 내렸다. 저 멀리 내린 그들은 그냥 만나 노는 친구들처럼 떠들며 레일 위를 건너 사라졌고 우린 패거리의 뒷모습을 하릴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우리나라라면 어땠을까.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아저씨들 몇이 당장 그 X들에게 달려들어 현행범으로 제압하는 동안 옆 사람은 112를 누르고 뒤의 젊은이는 폰으로 이 장면을 찍고 있을 거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겠는가. 피해자와 가해자가 눈 앞에 뻔히 있는데 누가 모른 척하나. 웬만한 음주 운전 차량을 경찰보다 먼저 추격하고 자신의 차량을 망가뜨려가며 막아서는 한국 아저씨들이 이런 파렴치범을 못본 척한다? 글쎄다. 그래서 아내와 한참 추정해봤지만 뾰족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 혹시 이 나라는 소매치기도 하나의 ’업‘으로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냥 묵인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서로의 ’영역‘에 개입하지 않는 건가?

사건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이런 의문에 대한 대화를 나눠 볼 현지인을 만나지 못했다. 말이라도 통하면 조곤조곤 꼭 물어보긴 하겠지만 그 많은 사람 중 누가 영어를 좀 하는지 일일이 말을 걸며 찾을 수도 없고… 호텔 직원들도 천차만별이라 간단한 대화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나 혼자 좋자고 바쁜 사람 붙잡고 뭘 묻다 보면 금세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생기니 이것도 민폐.

아무튼 이 문제 풀이는 장기 계획으로 남겨 두고, 아직은 기억이 파릇파릇할 때 타국에서 겪은 소매치기 (미수) 썰은 여기서 일단 마감하기로 한다. 이제 이들의 수법 - 붐비는 곳에서 호의를 가장해 주의를 분산시키고 터는 - 을 확실히 알았으니 또 걸리기만 해봐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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