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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인의 영어

볕좋은마당 2023. 8. 29. 11:28

영어는 명실공히 세계어다. 통계상으로는 만다린 중국어, 스페인어를 모어(母語)로 쓰는 인구가 더 많다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국가의 수는 70개가 넘는다고 한다. 세계 어디를 가도 영어가 통할 확률이 제일 높다는 얘기다. 게다가 관광업이 발달한 곳의 상인들은 영어로 응대를 잘하니까 어느 나라건 유명 관광지에선 영어 하나면 만사형통이다. 
 
패키지여행에선 가이드 덕에 별 문제를 겪지 않지만 자유여행을 가면 어떻게든 소통을 해야 하니 영어에 얽힌 '일화'가 여럿 생긴다. 유창하든 서툴든 피차 영어가 외국어인 사람들끼리 말을 하다 보면 서로 헤매기 일쑤다. 우리가 당연하고도(?) 익숙하게 배운 미국식 영어와 유럽 사람들이 쓰는 영국식 영어에도 차이가 있고, 서로 열심히 말하면서 서로 엉뚱하게 알아듣는 '사건'도 생긴다.
 
우리에게 한국식 영어와 발음이 있듯이 각 나라엔 그들 특유의 '체계'가 있다. 우리의 Konglish, 싱가포르의 Singlish, 중국의 Chinglish, 일본의 Japlish도 엄연히 있지 않은가. 오래전에 일본에 갔을 때는 지도를 펴고 헤매는 우리 부부에게 다가와 유창한 영어로 길을 안내해 준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말끝마다 일본어 하듯이 '~네'를 붙이는 거다. 이를 테면 'I know the store, ne~. Let me show you the way, ne~.'라고 하는 식이다.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듣는데 그의 친절함엔 고맙고... 하여튼 복잡한 심정이었다.
 
이스탄불의 어느 호텔 직원은 쉬지 않고 설명하는 간간이 '부지'라고 했다. 뭔 말인지 어리둥절했는데, 알고 보니 busy를 그렇게 발음한 거다. 당연한 듯, 자신 있게, 그것도 크게 말하면 아마 이건 내가 모르는 단어일 것으로 생각하고 자책부터 하게 된다. 다른 직원은 또 wear를 '위어'라고 계속 얘기하는 통에 앞뒤 맥락을 살펴 알아내느라 에너지를 소비했다. 튀르키예식 발음이 다 그런 건지 몇몇 사람들의 습관인지는 몰라도 듣는 사람은 이래저래 뇌의 온갖 회로를 돌려야 했다.
 
이탈리아에도 당연히 그들식 발음이 있었다. 한국인들이 cut의 끝을 굳이 커'트'라고, made의 끝을 굳이 메이'드'라고 발음하듯 거기 사람들은 우리라면 '으'할 것을 '아'로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cut을 커'타', made를 메이'다'라고 하는 식이다. 문제는 이탈리아어를 영어와 짬뽕시킨 어조로, 그것도 수다를 떠는 속도로 내뱉으면 듣는 사람은 해독하느라 애써야 한다는 거다. 게다가 유창한 영어와 이탈리아어 경음(硬音)의 콜라보까지...
 
Venezia의 이웃 도시인 Mestre에서 묵었던 호텔은 300년 전 영주가 살던 저택이었다. 그곳의 여직원 역시 여느 호텔리어처럼 영어를 잘했다. 렌터카를 운전해서 가는 길에 주유소에 들렀는데, 우리와 다른 결제 시스템이라 찜찜한 게 남아 물어본 일이 있었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건 좋은데 점점 탄력이 붙으며 이탈리아어의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듣는 사람까지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는 사태... 급기야 그의 발음은 이렇게 변질되어 갔다. '디쥬 우사 마스따라 까르다 오 비자 까르다?' 아, 이건 좀... 그나마 그땐 이미 3주 넘게 이탈리아 여러 곳을 다니며 나름대로 닳고 닳았기에(!) 알아들은 게 다행이었다. 지금도 아내와 같이 그 말을 흉내 내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미국 햄버거를 이탈리아 소스에 푹 담갔다 황급하게 건진 듯한 말투... '디쥬 우사 마스따라 까르다 오 비자 까르다?' = Did you use master card or visa card? 
 
여기저기 다니며 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Frankfurt에서 만난 택시기사의 영어를 들으면서는 또 현지에 맞는 내공이 필요함을 절감했다. 그는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먼 나라인 독일까지 와서 택시를 모는 데는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독일어는 당연히 잘하겠지만 영어까지 하니 신기하긴 했는데, 혼자 막 떠드는 걸 겨우겨우 따라가느라 피곤했다. 방글라데시식 발음이었을까. 그래도 나의 물음에 열심히 설명해 준 성의가 고마웠다.
 
하도 '향토색' 넘치는 발음만 듣고 다녀서 어쩌다 지나치는 미국인들의 말이 들리면 갑자기 뭔가 정화된 느낌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영미권 사람과 나눴던 대화를 꼽아봤다.

이스탄불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에서 나에게 이슬람에 대해 설명해 준 무슬림 여자는 특이하게도 캐나다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것도 자신은 'technically' 의사라면서... (살살 대꾸하다가 그만 제대로 잡혀서 30분 이상 전도 당한 건 비밀)

Firenze의 베키오 다리에서는 미국인 가족이 풍광을 즐기고 있었다. 부인과 두 딸의 사진을 찍던 남자에게 내가 대신 가족 모두를 찍어주겠다고 했다. 서울에서 왔다고 했더니 독일인 아내가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체조 선수로 갔었노라며 무척 반가워했다.

소위 '표준' 영어로 대화한 기억은 달랑 이거다. 나머지 99%는 각지의 '신토불이' 영어를 영접했던 일이었고, 아직도 '마스따라 까르다 오 비자 까르다'는 귓가에 쟁쟁거린다.
 
그런데 더욱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이스탄불에서 혼자 탁심 광장에 갔다가 근처의 호텔로 걸어 돌아오는 밤길, 초등학교 1~2학년이나 될까 하는 여자 아이가 따라와 옆을 걸으며 구걸을 했다. 그것도 영어로. 아, 이런. 인적이 드문 밤에 어린아이가 구걸하는 건 딱한 일이 아닌가. 어디서 배웠는지 내가 들어본 현지인 중 발음이 제일 좋았고, 그래서 더욱 짠한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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