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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자정리(會者定離)

볕좋은마당 2020. 12. 17. 12:10

회자정리(會者定離):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

 

  여기서 ()’가 사람만을 뜻하는 건 아닐 것이라 생각해 본다. 이번만큼은 사물에게도 한자리를 내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눈부신 과학 문명을 누리면서 한낱 사물에게 존엄한인간의 위상을 부여하려는 시도이긴 하다. 만물에 정령이 깃들어 있다는 Animism적인 발상 아니냐는 비아냥이 귓가를 스치지만 때로 물건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과학의 소산일지라도 과의 이별은 가슴 속에 스미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가정용 유선 전화를 해지했다. TV 옆에 겨우 한자리 차지한 전화기를 치워야겠다고 생각한 지 며칠 만이다. 침대 머리맡에 걸렸던, 단순하게 생긴 일체형 전화기도 같이 사라지는 운명이 됐다. 중고나라를 대체하여 요즘 뜨고 있는 당근마켓에 두 개 합쳐 단돈 만 원에 내놓으니 누군가가 냉큼 가져갔다. 수도 없이 이사를 다니며 늘어나기만 한 전화선 또한 뭉텅이 뭉텅이로 한 짐이었다. 한때는 없으면 안 되는 부속물이었지만 본체와 함께 떨이로 팔려가는 신세가 되었다.

 

  이사하거나 가구 배치를 다시 할 때마다 선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플러그 달린 전선에 멀티탭, 오디오 선, 충전기에 온갖 어댑터 선까지 어지러움 그 자체였다. 선의 개수가 문명 수준의 척도인 양 복잡하게 엉켜있기 일쑤였으니 매번 한숨이 나올 수밖에... 가끔 정리를 한다고는 하지만 얼마 지나 또 어지럽게 꼬인 데는 분명 누가 몰래 들어와 휘젓고 갔기 때문이라는 의심마저 들었다. 어쨌든 유선 전화기 하나에 딸린 어댑터 선과 전화선, 무려 두 줄이 각각 두 곳에서 제거되었으니 정신 사납던 선의 뭉치들 사이에도 바람길이 생긴 거다.

 

  많은 가정에서 식구 수만큼 휴대폰을 가지면서 생긴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바로 유선 전화의 소멸이었다. 가정과 가정을 연결해 주던 전화가 개인들 간의 연락을 위한 개인용 기기로 바뀌면서 이젠 개인이 가정으로 연락할 일이 사라진 것이다. 기실 쓸 일이 없다시피 한 집전화가 울릴 때는 십중팔구 선거철의 여론조사(를 빙자한 후보에 대한 광고)거나, 그게 아니라면 기획부동산에서 무작위로 번호를 돌린 ~은 토지 있습니다!’ 류의 마케팅이었다.

 

  그럼에도 선반 위 유통기간 지난 통조림처럼 손길도 안 가고 자리 차지만 하던 집전화를 내내 갖고 다녔다. 사람들을 이어주는 기능을 휴대폰에 내어준 지 이미 오래인데도 왜 여태껏 없애버리지 못한 걸까. 어린 시절부터 늘 반가운 소식을 전해준 존재였지만 막상 치우려니 그것의 빈자리를 마주하는 순간 닥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동안 존재의 고마움을 몰라본 것에 대해 뒤늦게 우러나온 미안함 탓이었을까.

 

  아내를 시켜 통신사에 연락해서 해지하라고 했다. 해지를 결정하고 며칠은 수십 년 전 군에서 경험했던 느낌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굳이 언어로 바꾸자면 설렘과 아쉬움, 시원섭섭 같은... 제대가 코앞에 다가온 얼마간은 새로 맞을 해방의 설렘이 있었지만, 사람들과 때때로 치고받고 같이 놀기도 하며 들어버린 미운 정 고운 정과도 영영 작별이라는 아쉬움도 있었다. 집전화의 처분을 결정하고 나서도 조금은 비슷한 느낌이 되새김질되었다. 함께 있을 때는 좋았지만 미처 좋다는 생각은 못했고, 더 좋은 일로 헤어지지만 그립다고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시절에 대한 아련함이리라.

 

  집에서 유선 전화기가 없어지는 것도 작지만 모른 체 하기엔 아쉬운 삶의 한 고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마트폰에 비하면 이용 가치는 물론 가격에서도 워낙 차이가 나는 전화기에 대한 시시콜콜한 얘기는 무의미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게다가 요즘 스마트폰의 성능을 예전의 것과 비교하려는 시도는 가당키나 한가. 요즘의 은 라면 끓이는 냄비나 물 뿜는 샤워기 헤드로 못 쓴다는 게 의아스러울 정도로 사실상 일상의 거의 모든 기능을 담은 신묘한 물건이 아닌가.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말은 전화기에 대해서도 잘 들어맞는다. 우리 세대는 몽당연필을 볼펜 자루에 끼우고 쓰는 시절을 보냈고 흑백 TV가 컬러로 바뀌는 개벽을 겪었는데, 이젠 자고 나면 신제품을 만나는 혁신의 시대를 살고 있다. 멀리 있는 친구나 친척의 소식을 알려면 집에 가서 수화기를 들어야만 했는데, 이제는 거리를 걸으면서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유튜브로 볼 수 있으니 이런 게 개벽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말로 이런 격변을 표현할 수 있을까.

 

  조선시대까지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은 농기구를 보면서 이야기했을 테고, 광복과 전쟁 뒤의 한국에선 부모와 자식이 비슷비슷하게 생긴 기기를 같이 썼을 것이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했다 해도 생활 도구의 분류와 개념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였으니까. 하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의 탄생으로 인류는 이전엔 상상도 못한 도구와 동작을 매일 경험해야만 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밤마다 TV 뉴스 말미에 나와 내일의 날씨를 전해 준 중앙기상대 김동완 통보관을 기억하는가. 우리는 그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슥슥 그리는 고기압 저기압의 동그라미를 보며 내일 날씨를 통보받았다. 뉴스를 놓치면 다음 날 신문의 예보 난를 찾아보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다 우연히 집전화로 131번을 걸면 자동으로 매시간 기준 일기예보가 나온다는 걸 알아 내고는 마냥 기뻐했다. 김동완 통보관의 얼굴을 봐야 내일 날씨를 알 수 있었던 세대는 각자의 스마트폰 앱을 열어 지금 걷고 있는 동네의 날씨를 시간 단위로 찾아보는 세대와 같은 집에 살고 있다. 김동완 통보관을 기억하는 세대와 날씨란 으레 앱으로 보면 되는 세대 간의 도드라진 단절은 결국 눈부신 기술 발전이 촉발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1960년대, 집집마다 있지는 않았던 전화기 한 대가 요즘 자동차 한 대의 가치보다 컸다는 얘기는 ‘11 전화가 당연한 지금 젊은 세대에겐 거짓말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1960년대 말인지 1970년대 초인지 희미한 어린 시절부터 우리 집엔 전화기가 있었다. 넉넉해서였다기보다는 문화적인 것에 더 지출하는 집안 분위기 때문이었으리라. 당시 전화기가 무척 비쌌다고 하는데 어떻게 우리 집에 전화기를 들여놓았는지는 아직도 불가사의다. 얼마나 고가의 물건이었는지는 아래 <연합뉴스> 2008814일 자 <최신 뉴스>에서 말하고 있다. (일부 발췌)

 

<60년의 변화상> 전화 값이 아파트 한 채

 

(전략)

 

  요즘은 초등학생도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지만 예전에는 전화 한 대 값이 아파트 한 채 값과 맞먹었다. 1980년대 전자식 교환기 도입으로 아무 때나 전화 가입이 가능해지기 전까지 전화는 당당히 ‘재산목록 1호’였다.

 

  1955년 전화 가입자는 3만 9천 명에 불과했다. 장‧차관이나 검찰간부, 국회의원 정도가 아니면 언감생심이었다. 1962년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하면서 전화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전화를 사고팔 수 있도록 허용하니 전화 값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전화를 사고팔거나 전‧월세를 놓아주는 '전화상’이 서울에만 600여 곳이나 성업했다.

 

  전화를 둘러싼 부조리가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정부가 전화 매매를 금지했다. 정치권과 언론이 들고일어났다. 실수요자가 피해를 본다는 논리였다. 결국 새로 가입하는 전화는 매매를 금지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루어졌다. 백색전화와 청색전화로 나뉘게 된 배경이다. 전화 색깔이 아니라 가입 대장의 색이 각각 흰색과 청색이었던 데서 유래했다.

 

  이 조치 후 전화 값은 더 뛰었다. 1978년 청색전화 신청 대기자는 60만 명이었고 백색전화 한 대 값은 260만 원까지 치솟았다. 당시 서울시내 50평짜리 집값이 230만 원 안팎이었다.

 

  전화 값 거품은 1978년 전자식 교환기를 들여오면서 비로소 꺼졌다. 1986년 한국이 세계에서 10번째로 디지털식 전자교환기(TDX)를 독자기술로 개발하면서 전화는 특권층의 전유물에서 서민의 통신수단으로 거듭났다. 지금은 국민 두 명 중 한 명 꼴로 보급됐다.

 

(후략)

 

  당시 우리 집 전화기는 이렇게 생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아이들이 전화 아이콘()이나 수화기 아이콘(?)이 왜 통화 표시인지 묻는다는 얘기들 듣고는 무릎을 쳤다. 이런 전화기를 본 적이 없는 세대와 우린 시나브로 동시대인이 된 것이다. 하긴 완행열차 타는 것도 호사였던 80대 노년과 유명한 우동집에서 점심을 먹겠다며 비행기로 일본에 다녀오는 20대 청년이 한 시대에 사는 마당에 그깟 전화기에 대한 기억이 대수일까만은...

 

  말 나온 김에 아이콘 얘기를 하나 더 하자. 우리는 온갖 프로그램의 저장(?) 아이콘을 하루에도 수십 번 넘게 누르지만 디스켓을 모르는 세대는 이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니 결국 학습을 통해 익혀야 한다. (20대 태반이 디스켓을 실물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당연하지만 또한 새삼스럽다!) 물건은 사라져도 아이콘은 남는다고나 할까. 여기에 관해서는 디스켓과 예수가 같다는, 어디선가 마주친 기발한 익살을 적어본다. “플로피 디스크들은 예수와 같다. 그들은 죽어서 Saving(저장, 구원)의 아이콘이 되었다.”

 

  언어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있다. 행동이나 동작은 사라지고 없는데 표현만 살아남은 사례다. 우리는 시치미 떼다라는 표현을 자주 쓰면서도 시치미가 옛날에 매사냥을 할 때 매의 꽁지에 단 주인의 이름표라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이라면 이런 것이야말로 유래를 모른 채 그냥 외워야 하는 낯선 표현일 뿐이다.

 

  분야를 영어로 넓혀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pull over’차를 길 가에 대며 세우다라는 뜻으로, 대부분의 학습자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무작정 암기해야 할 표현이다. 하지만 차를 세우는 행동이 뭔가를 당기는것이 아니라 발로 브레이크를 누르는것인데 어째서 ‘stop’이나 ‘step on/put on the brake’ 대신 당기다(pull)’는 말이 쓰일까. 운전하면서 손으로 당길 수 있다면 운전대(Steering wheel) 정도일 텐데, 그걸 당긴다고 차를 세울 수는 있는가.

 

  눈치챘겠지만 이것은 마차가 요즘의 자동차처럼 흔하던 시절에 쓰던 말이다. 마차를 세울 때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줄을 당겼으니 당시엔 일반적인 표현이었지만 세월이 지나 자동차에서도 이 말을 계속 쓰게 된 것이다. 이토록 우리는 직관과 거리가 먼 말을 수시로 하면서 살고 있다. ‘전화를 끊다(hang up the phone)’도 공중전화 수화기를 본체에 걸어 끊는 모습을 떠올리면 쉽다. 설마 수화기를 무언가에 거는(hang up) 동작으로 통화를 끊는 사람이 요즘 있을까. 그렇다고 접촉(tag)하여 통화를 마친다는 말을 새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미 있는 표현이 사라지지 않고 회자된다면 후대에선 영문도 모른 채 외워야 하는 숙어로 남고 애꿎은 학생들이 지겨운 암기의 늪에 빠지는 것이다. (사실 흔히 말하는 숙어(Idiom)’의 개념엔 혼선이 좀 있다.)

 

  어느 문화와 어느 언어가 되었든 이런 류의 부조화는 있을 것이고, 이는 불완전한 인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문화와 언어 모두가 규범적(prescriptive)이 아니라 기술적(descriptive)인 존재라고 전제한다면 이런 식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기보다는 그냥 추억에 젖어 감상이나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겠다. ‘어처구니없다어처구니고문관의 유래를 몰라도 일상의 언어 생활을 잘만 하듯 앞으로의 세대는 사용 경험은커녕 본 적도 없는 디스켓의 모양을 그냥 저장이라면서 잘만 클릭하게 될 것이다. So what?

 

  뜬금없는 아이콘 얘기로 샜는데, 전화기로 돌아가 보자.

 

  처음 전화를 놓았을 때 우리 집 번호는 믿기 어렵겠지만 달랑 527번이었다. 지방 소도시였기에 전체 가입 대수가 1,000대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위의 옛날 전화기 사진처럼 돌리는 다이얼도 없는데 어떻게 번호를 누르냐고? 그냥 수화기를 들면 여자 교환원이 응대했던 시절이다. ‘000번이요또는 세무서 바꿔주세요라고 하면 알아서 바로바로 연결해 주었다. ‘경화루같은 동네 중국음식점 상호를 말하면 기다리세요라는 말이 채 다 들리기도 전에 연결되는 게 어린 마음에도 신기했다. 작은 도시라서 교환원들이 관공서는 물론 웬만한 상점의 번호는 거의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에서 보이듯 당시엔 교환원들이 잭을 여기저기로 빼고 꽂는 일을 반복하며 전화를 연결하였다. 2차 세계대전~1960년대쯤을 배경으로 한 미국 영화에서도 이런 장면들을 간혹 볼 수 있다.

 

  결혼이나 독립으로 타지에 사는 가족이 생기면서 시외 통화를 할 일이 생겼다. 여전히 수화기 너머 교환원에게 서울 시외전화 신청합니다. 00-0000번이요라고 말하고 수화기를 놓아 전화를 끊고 기다려야 했다. 당시 시스템의 한계였겠지만 교환원이 직접 서울로 연결한 다음 우리에게 다시 전화를 거는 방식이라 이래저래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통화료가 절대 싸지는 않았을 테니 시외 통화라는 게 안부와 용건에 반가움과 다급함이 뒤엉킨 모습이었다. 비싼 시외전화를 하는 마당에 식구들이 한 번씩 수화기를 잡는 건 언감생심. 어머니는 시집간 딸의 비싸고 귀한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큰 목소리로 통화하셨다. 마음껏해도 과금이 얼마 안 되는 요즘의 통화 시간에 비하면 찰나동안의 대화가 끝나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면 잠시 뒤 교환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두 통화 반입니다라는 건조한 통보는 우리가 다음 달에 내야 할 시외 통화 요금 청구서로 돌아왔다.

 

  집전화 번호가 527 세 자리에서 3427이라는 무려(!) 네 자리로 바뀐 건 다이얼식 전화기가 나오면서였을 것이다. 다이얼을 돌리는 촉감은 아주 좋았다. 숫자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빼면 반대쪽으로 드르르르 되감겼다. 어느 집이나 할 것 없이 다이얼의 중심에는 용건만 간단히가 간신히 끼우느라 조금은 쭈글쭈글해진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다. 그 종이에 손으로 쓴 3427은 나의 소년 시절을 함께 한, 원래부터 내 살갗에 있던 점처럼 보기 싫다고 없애거나 한순간에 잊을 수는 없는 그 무엇이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 중 이 번호를 얘기하면 새삼 기억날 사람도 있을 테다. 한 학년 전체가 달랑 두 학급인 분교로 시작한 작은 학교였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한 번도 반이 뒤섞이지 않고 졸업까지 했으니 남의 아버지 성함은 물론 직업까지 알 정도로 우리는 가까웠다. 넉넉지 않던 시절이라 전화가 있는 집도 드물어서 가끔 거는 전화번호라는 게 뻔했다. 게다가 방학식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받던 비상연락망에 그나마 몇 안 되는 전화번호가 올라가 있었으므로 우리집 3427번은 누구에게나 항상 노출된 것이었다.

 

  그땐 비상 연락망이 있었다. 요즘도 기관마다 비슷한 게 있지만 1970년대 시골 학교의 비상연락망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한 반 50~60명 전부가 아니라 겨우 10명 남짓한 집의 전화번호만 등사기로 인쇄한 종이... 그런 것이 기억난다면 50대 이상 인증이다. 글자 그대로 비상시에 서로 연락해서 학교에 모이도록 만든 표다. 고등학생은 물론이고 대학생까지 교련 수업을 받던 시대의 정부는 지속적으로 온 나라에 전쟁의 공포를 환기시켰다. 그렇게 국민을 옥죄는 통치를 했고, 물정 모르는 코흘리개들도 비상에 대비해야 했다. 꼭짓점인 담임선생님 바로 아래 전화 있는 집을 배치하고 담임의 전화를 받은 몇몇은 각자 자신의 아래에 이름이 오른 친구들 집을 일일이 찾아가 알렸다. 민방위 훈련 당시엔 민방공 훈련이라고 했다 을 하면 몇 안 되는 아이들은 집에 전화가 있다는 죄(?)만으로 친구의 집을 향해 뛰어야 하는, 막중한 전령의 임무를 수행했다.

 

  다이얼 전화의 3427번은 후에 국번이 붙기 전까지 꽤 오래 유지되었다. 10여 년 전 차를 바꾸면서 영업사원에게 번호판 등록할 때 3427번을 받아달라고 은근히 압력을 넣었지만 그도 나름대로 최선은 다했다 결국 3227을 달았다. 10년이 흘러 새 차를 구입하면서 재차 시도를 했으나 이번엔 끝 자리가 77인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어린 시절 집전화에 대한 아련한 추억은 나이를 먹고도 한낱(!) 자동차 번호판에까지 같은 번호를 부활시켜 보려는 헛된 시도로 투영되기도 한다.

 

  다이얼식 전화기로 바뀌고 얼마 뒤, 1980년대 말에 가서야 전국적 이용이 가능케 된 장거리 자동 전화(DDD: Distant Direct Dialing)는 획기적인 전환이었다. 서울 02, 경기 031, 충북 043 등의 지역번호가 생겨 일일이 교환원에게 신청하고 기다리는 일 없이 다이얼만 돌리면 바로 시외전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하지만 시외 통화 요금은 여전히 비쌌고 한참 후에 휴대폰을 갖게 되었을 때 시내 시외 할 것 없이 같은 요금을 낸다는 사실이 한동안 낯설기도 했다. 오랜 기간 집전화를 쓰던 습관이 생득적인 본능처럼 몸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던 것이다.

 

  매번 교환원을 통하는 번거로움은 덜었지만 DDD는 여전히 요금이 비쌌다. 이용이 쉽다고 막 쓰기엔 부담스럽기 마련이라 자기 집에선 참고 아끼다가 다른 데서 몰래 시외 전화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나 보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가게나 기관 같은 곳의 전화 다이얼엔 어김없이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그 작은 다이얼 구멍에 맞는 자물쇠가 있다는 것도 신기했다.) 다이얼을 돌리다 보면 중간에 더 못 가게 막혀있으니 시외든 시내든 전화를 하려면 누군가가 열쇠로 열어줘야만 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 세상에는 언제나 얍삽한해결책이 있기 마련이고, 자물쇠를 무력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었다. 경북 왜관의 캠프 캐롤(Camp Carroll)이라는 미군 부대에서 군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내가 근무하던 중대본부 책상 한쪽에 이런 자물쇠 달린 전화기가 있었는데, 부대 내 통신용 전화가 책상마다 있었지만 별로 쓸 일은 없던 외부용 전화기가 바로 이런 종류였다. 밤에 당직을 설 때나 오가며 들를 때마다 이 전화기는 끊임없이 나를 유혹했다. 가끔은 집에 전화를 하고도 싶고,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연락하고도 싶어지는 거다. 과연 자물쇠로 굳게 잠긴 다이얼을 돌리지 않고 전화하는 방법이란? 바로 아래 그림에 나오는 대로 하는 거다! (혹시나 하여 찾아보니 이미 인터넷에 이 방법을 도식화하여 설명한 게 있다. 세상은 참...)

 

  생각해보면 단순한 원리였다. 다이얼을 돌렸다 놓을 때 거꾸로 회전하면서 나는 드르르륵소리는 접점의 차단과 연결이 반복되는 소리였다. 이런 단속(斷續)의 숫자를 나열한 것이 우리가 알던 전화번호인 것이다. 그러니까 다이얼로 돌리는 3-4-2-7은 그림에서 초록색 원의 스위치를 3-4-2-7회 연속적으로 눌렀다 떼면 되는 신호였다. 이거야말로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절치부심 알아낸 쾌거(!)가 아닌가.

 

  그러니까 서울 지역번호 02는 스위치를 10-2회 누름으로써 만든다. 지역번호가 모두 0으로 시작하니까 우선 10회를 눌렀다 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지역번호-국번-네 자리 번호 사이엔 정확한 휴지(休止: pause)를 두어야 한다. 말이 쉽지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 실상 부단한 노력과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관건은 누르는 속도와 간격을 다이얼이 되감기는 것과 똑같게, 그것도 정확한 횟수로 스위치 단속으로 구현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방법은? 처절한 ~~이다! 순간적으로 뭔가가 어긋나도 엉뚱한 집으로 전화가 가기 일쑤라 전장에서 적군 장교에 대한 일발(一發)을 노리는 저격병이라도 된 양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조금씩 성공의 경험을 늘려나갔다.

 

  중대본부에 들르는 밤이 잦아지며 손가락 기술은 그야말로 신묘해져 갔고, 부모님께 친구에게 전화하는 재미도 더불어 쏠쏠해졌다. 분명히 자물쇠로 잠갔는데 자꾸만 늘어나는 시외 통화요금은 부대 입장에선 불가사의였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방법을 안 동기와 후임들까지 작지만 따뜻한 시혜를 즐겼다. 나의 어쭙잖은 창발(創發)’의 결과로 부대의 통신비가 갑자기 올라가는 일이 있었을까? 혹시라도 당시의 불가사의한 적자로 추궁을 당했거나 입장 곤란했던 사람이 있다면, 세월이 한참 지났지만 이제라도... ‘~!’

 

  전화기에 대하여 쓰다가 수십 년 전 군생활 때의 일화까지 거슬러 올라가 버렸다. 모병제의 미군과 징병제인 한국군을 같이 놓고 비교하는 건 맞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군보다 훨씬 많은 자유와 합리성을 누렸던 미군 부대에서도 외부로 전화 한 통 하려면 이렇게 천신만고의 여정을 지나야 했다. 요즘엔 우리 군대에서도 (물론 제한적이지만) 일과 후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다니, 군 생활 내내 밤마다 점호에 시달린 세대가 보기엔 이것 또한 상전벽해가 아닐까.

 

  이런저런 희미한 기억과 아련한 추억을 뒤로하고 유선 전화기는 집에서 사라졌다. 오랜 기간 나의 삶을 지켜보았으며, 기쁜 일 슬픈 일 급한 일 급하지 않은 일 가리지 않고 수화기를 통해 주변인들의 목소리를 들려준 기기였다. 두툼한 다이얼식 전화기에선 본체 안의 작은 망치가 벨을 때려 따르릉소리가 났고, 뒤에 나온 전자식 전화기에선 단순한 전자음인 띠리리리리가 나왔다. 전자식 전화기는 입맛에 따라 선택할 여러 멜로디를 제공했는데, 당시엔 그것도 기술의 발전이 주는 혜택이라며 신기해했다. 비단 소리뿐 아니라 유선-유무선-무선의 형태로 다양해졌고, 온갖 색깔과 디자인이 망라되어 이제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전화기의 모습이 다 나온 게 아닌가 하기도 했다. 물론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얘기다.

 

  겉모양이 어떠했건 간에 예전의 집전화들은 작은 구멍 네 개가 뚫린 소켓에 연결된, 통화밖에는 되는 게 없는 그냥전화기였다.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켰고, 가상 세계가 아닌 현실의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였다. 일상의 웃음과 눈물, 감탄과 한숨, 연인들의 속삭임과 고뇌가 담긴 목소리를 들려주던 이런 구식전화기는 인류가 당대의 과학기술 역량을 총동원하여 만들어 낸 스마트폰에 결국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유선 전화 100년의 발전상이 불과 10여 년 된 스마트폰의 눈부신 진화에 덮여 버린 것이다. 그뿐인가. 스마트폰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단순한 효용을 넘어 다방면으로 유능해진 나머지 우리 몸 안의 장기나 다름없는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세상엔 그립다고 해서 되돌릴 수 있는 일은 많지 않고, 해지해버린 집전화는 더욱 그렇다. 스마트폰의 거대한 너울에 잠겨 소박하지만 우직하게 자기 몫을 다했던 우리집 구식 전화기는 이렇게 사라졌고, 이런 글에서나 자취를 남기게 된 것이다.

 

  회자정리... 사람과 물건도 필경 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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