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동안 전주 한옥마을에서 사흘을 보냈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은 채 차를 몰고 신혼여행을 다니다 전주에 잠깐 들렀고, 세 식구가 고택 <학인당>에서 하루 묵은 게 십수 년 전이었으니 실로 오랜만의 방문이다. 당시의 기억이 거의 사라졌을 뿐 아니라 한옥마을이 그동안 대대적으로 조성되고 단장되어 전혀 새로운 곳에 간 듯했다.
신혼여행 때 전주역 앞을 지나며 전주 역사(驛舍)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지금도 아끼는 물건이다. 우아하고 멋진 한옥 지붕을 얹은 전주 역사만 봐도 전주는 입으로만 전통문화 운운하는 도시가 아니라는 증거다. 그러기에 삶의 쉼표로서 문화를 향유하고자 한다면 전주는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곳이다. 최근에는 전주 톨게이트에 걸린 '전주'라는 글씨가 효봉 여태명 님의 작품이라는 기사를 보고 역시 '예향' 전주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갔을 때는 (내용도 모르면서) 코앞에서 듣던 판소리의 감흥을 만끽했는데, 그때도 길 가의 많은 간판이 아무렇게나 찍은 컴퓨터 폰트가 아니라 훌륭한 서예가의 솜씨임을 알고 이 도시의 문화 수준에 감탄했다. 여러 모로 분명 전주는 예향으로 불리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먹을거리, 볼거리, 놀 거리가 다양하고 풍성하니 휴일엔 사람들의 달뜬 얼굴과 청춘들의 재잘거림으로 넘쳐났다. 한옥마을에 대한 정보며 풍경이며 감상을 여기서 언급하면 결국 중언부언이 된다. 그런 건 사회관계망(Social Media, SNS는 콩글리시!)에 이미 넘쳐나고 있지 않은가.
한옥마을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나를 홀리다시피 했던 건 곳곳에서 빛나는 글씨다. 수많은 현판(간판)이 호남을 대표하는 서예가들의 손끝에서 나왔는데, 생각에 따라선 별 것 아닌 간판에 대한 이 정도 안목 또는 대우(?)는 전주에서만 느낄 수 있다. (이렇게 일 잘하는 전주시 공무원에겐 칭찬을 아끼면 안 된다!)
동전주 톨게이트로 나오는 바람에 위에서 얘기한 효봉 여태명 님의 글씨 아래를 지나가지는 못했지만 한옥마을에서는 고개 돌릴 때마다 만날 수 있었다. 어디 효봉의 글씨뿐이랴, 처음엔 별생각 없이 걷다가 하나둘 눈에 띄는 글씨들이 발길을 잡기 시작했다. 나의 입에서 외마디 감탄이 잦아졌고, 결국엔 폰을 들고 찍기 시작했다.
짜잔~! 전주 한옥마을을 알리는 표지석부터 뒤에 보이는 <전주소리문화관>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팥빙수집 앞에서 이 글씨를 보고 그대로 멈췄다. 낙관을 살펴보니 무려(!) 효봉 여태명 님의 글씨다. 시간이 늦어 팥빙수를 맛보지는 못했지만 굳이 가게에 들어가 주인에게 훌륭한 글씨에 감탄했노라 인사치레를 하고 나왔다.소박하지만 정갈한... 역시 효봉 여태명 님의 글씨다.승광재에 사는 황손 이석 씨는 옛날에 종종 TV에 나와 <비둘기 집>을 불렀던 가수다. <첼로네>는 좁은 골목길 안의 한옥 펜션인데 멋진 나무 간판을 보는 순간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이 집 말고도 많은 한옥 펜션이 서예가의 붓 끝에서 나온 간판을 쓰고 있다. <황손의 집>은 효봉 여태명 님의 글씨고 <첼로네>는 중하 김두경 님의 글씨다. <첼로네>는 처음에 효봉의 글씨로 여겼는데 <첼로네> 주인장께서 직접 알려주셔서 바로잡게 되었다. 몇 발짝 걸을 때마다, 고개 돌릴 때마다 마주치는 멋진 글씨 그리고 글씨. 맨 오른쪽 <지숨>은 한지에 사진을 인화해 주는, 특이한 상품이 많은 가게다.낙관이 없어서 글씨만 갖고는 누구 작품인지 알기 힘든 현판도 꽤 있다. <전주공예품전시관>이 산민 이용 님의 글씨라는 것을 후에 검색으로 알게 되었다. 역시 산민 이용 님의 글씨다.안명자 님이 운영하는 김치문화연구소 겸 김치 전문 식당이다. '안명자'라는 낙관이 찍혔는데 낙관이라기보다는 식당의 주인 이름을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수많은 서예공모전에서 입상한 같은 이름이 있는데 동명이인일 수도 있다. 다음에 가면 꼭 물어보는 걸로...전통술 박물관 <수을관(酉禾乙館)>. 중하 김두경 님의 글씨다.수을관 내부의 <양화당(釀和堂)>. 술을 빚는 것이 곧 어울림(和)을 만든다는 말이 아닐까. '화'는 술 익는 걸 다시 한번 되돌아보며 살피는 사람의 형상이며, '당'은 정성을 다했노라고 자부하며 으스대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중하 김두경 님의 글씨.수을관의 양화당 맞은편 <계영원(誡盈院)>. 가득 채움을 경계하라고 한다. 심석 김병기 님의 글씨다.획의 오르내림에 맞춰 음악의 흥을 만들어내는 느낌이다. 취석 송하진 님의 글씨다.중하 김두경 님의 글씨다. 현판(세화문)도 멋지지만 오른쪽 세전미풍(世傳美風) 왼쪽 화성양속(化成良俗)도 보기 좋다.홍삼 제품을 비롯해 다양한 먹을거리를 파는 가게다. 어째서 서울에선 이런 낭만 넘치는 손글씨 간판을 보기 힘든 것인가.다른 글씨들과 마찬가지로 발길을 멈추게 했던 간판이다. 멋진 글씨가 금속판에 새겨져 색다른 분위기를 낸다.한옥 호텔 주인의 예술적 감각이 엿보이는 <나비잠>. 누구의 솜씨인지는 나중에 전화라도 해서 알아보는 걸로...한옥 마을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카페 <전망>의 1층에 있는 음식점이다. 한식을 파는 식당의 간판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단 한 글자에서도 멋이 넘쳐나지 않는가.<정남헌>. 취석 송하진 님의 글씨다.또 취석 송하진 님의 글씨고개를 들어 위를 봐도 좋은 글씨가 널렸다.우연히 들어가 둘러본 최명희 문학관에서 한옥 마을의 글씨 중 압권을 만났다. 효봉 여태명 님의 글씨로서 '낯섦'을 보여준 'ㅊ'이 새롭다. 'ㅊ'은 걸어가는 사람 모습을 표현한 것이고 흰 'ㅁ'은 원고지를 상징한다고 한다. 역시 최명희 문학관 안에서 만난 효봉 여태명 님의 글씨. 혼자서 즐거움을 누리는 집이라는 <독락재(獨樂齋)>. 홀로 자신과 대면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긴 작가의 경지를 나타냈고, '독'은 무릎 꿇고 앉은 사람, '락'은 방울을 흔들며 즐기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한다.디저트 카페 <외할머니 솜씨>. 역시 효봉 여태명 님의 글씨다. 낯설게 쓴 'ㅆ'에 눈길이 머문다.중하 김두경 님의 글씨다. <첼로네>에서 처럼 'ㄹ'에서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효봉 여태명 님 글씨. 민간 상점의 간판뿐 아니라 공적인 건물에도 효봉의 글씨가 단연 많다. '부'의 'ㅂ' 안에 三色은 오방색을, '문'의 파란 'ㅁ'은 가공되기 전의 원단을 상징한다고 한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전주 향교 앞에서 마주친 글씨.오른쪽 낙관처럼 찍힌 전동(殿洞)은 서예가의 호가 아니라 전주의 지명 '전동'이다.심지어 한의원 간판도 서예가의 멋진 솜씨를 입었다.한글 간판은 대부분 판본체 아니면 (효봉 여태명 님의 민체를 포함한) 현대 서예 풍이어서 오히려 '정통' 궁서체 흘림이 돋보인다.<풍남헌>. 담백하면서 꾸덕꾸덕한 필체가 일품이다.<일락당>. 주변의 글씨에 비하면 지나치게 멋을 내지 않고 정갈하게 쓴 예서 현판이다. 맹자에 수록된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군자의 첫째 즐거움인 일락(一樂: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소담원(笑談圓)>. 금하 김두경 님의 글씨다. 웃을 '소(笑)'에서는 수다를 즐기려고 뛰어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가! 어딘가에서 본 설명으로는 '원(圓)'은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는 입의 모양이라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적토성산(積土成山)>.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의 한문 버전이다. 하산 서홍식 님의 글씨다.역시 하산 서홍식 님의 글씨. 죽기 전에 이런 글씨를 한 번 써보는 게 가능이나 할지...낙관이 흐리게 찍혀서 작가가 누군지 알기 힘든다.정말 하루 종일 보고 있으면 운수가 열릴 것 같지 않은가. 글씨의 표정이 익살스럽고 호탕하다.한옥마을 어귀에 눈에 확 띄는 글씨가 있었는데 가던 길이 바빠 지나쳤다가 나중에 돌아와 찍었다. 오른쪽 긴 세로 간판은 그늘진 뒤켠에 방치되다시피 한 건데 이 역시 대가의 숨길을 내뿜는 글씨다. (아래 사진 참조)어쩐지 대단하다는 느낌은 틀리지 않는 법. 위 <남창당한약방>을 쓴 주인공은 하산 서홍식 님이다. 바로 근처 건물의 <松潭齋>에 하산서(荷山書)라고 낙관이 되었는데 넋놓고 보던 나에게 '이제 누구인지 알았나?'라고 말을 거는 듯 내려다 보고 있었다. 건물 주인의 호를 딴 당호이다. 물론 한옥마을의 모든 간판이 서예 작품으로 되어 있는 건 아니다. 업소 주인이 대충 손으로 쓴 글씨도 있고, 컴퓨터로 멋없이 인쇄한 것들도 보인다. 하지만 이곳 전체의 분위기는 기왕 컴퓨터로 찍는 것이라면 되도록 손글씨 스타일로 하는 거다. 요즘엔 손글씨로 착각할 만큼 감쪽같은 폰트가 많아서 한참 관찰하고 비교하지 않으면 구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이런 작지만 일관된 노력이 모여 한옥마을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있다. 온갖 글씨 사진과 허술한 얘기로 도배를 했는데, 한옥마을의 '위엄'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이 또 있다. 곳곳의 편액과 현판을 보며 대가의 숨결에 취해 걷다가 한쪽에 들어선 한복대여점의 입간판을 보고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서예가가 써 준 건 아닐 테니 분명 가게 주인(또는 지인)이 직접 쓴 손글씨일 것이다. 붓에 먹물을 묻혀 쓰지만 않았다 뿐이지 필체의 아름다움과 절묘한 공간 배치로 글씨를 구성한 감각이라니! 길거리에서 마주친 필부필부(匹夫匹婦)의 손글씨도 여행자의 눈길을 끄는, 이런 문화의 힘이 한옥마을에 흐르고 있다. 문화의 힘에 대해 하나 더. 한옥마을 벤치에서 이런 꽃 그림을 보았다. 피곤한 다리를 쉬어가는 사물의 기능은 누구나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장의 필요를 넘어 지나는 사람의 고단함을 어루만지고 영혼을 쉬게 해 주겠다는 마음 씀씀이가 가상하지 않은가! 한옥마을이 사람들을 대하는 '곰살맞은' 방식이다.한옥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카페 <전망>에 올랐다. 서쪽으로 지는 해에 비친 마을이 고즈넉하다.카페 지붕을 통해 본 가을 하늘가을 아침, 깨끗하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돌 덮인 길을 걸어 카페에 올랐다. 옛 시대로 시간 여행을 온 듯 고즈넉한 마을을 눈 아래 놓고 커피를 홀짝이면 그야말로 시청각에 미각과 촉각, 후각이 다 살아 숨쉬는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카페 홍보는 절대 아니므로 이 글로 생기는 것도 없음!)
맺으며...
불과 2박 3일. 한옥마을을 어슬렁거리는 게으른 여행자에게 모든 편액(扁額: 종이나비단,널빤지따위에그림을그리거나글씨를써서걸어놓는틀)과 현판(간판)이 다 얼굴을 보여줄 리는 만무다. 그 유명한 경기전에는 들어가지도 않고 겨우 맞은편 전통차 카페에 앉아 쌍화차만 홀짝였으며, 한옥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오목대는 옆으로 지나쳐 버렸다. 국내 최초 서예 전문 전시관이라는 <강암 서예관>에 가면 유학자이자 서예가인 강암(剛庵) 송성용(宋成鏞: 1913~1999) 님의 작품 속에 파묻힐 수도 있었는데 그런 곳이 있다는 걸 돌아와서야 알았으니... 이런 '무계획'하고 '무성의'한 여행자에겐 그야말로 '자비란 없다'!
하지만 뭐, 자유 여행이란 그런 것 아니겠는가. 있으면 좋고 없으면 할 수 없고, 알면 반갑고 모르면 별수 없고, 보이면 보고 맛있으면 사 먹고 다리 아프면 쉬고 하는... 이번에도 하루만 묵고 귀경하려다가 갑작스레 눈길을 사로잡은 한옥 숙소에 불쑥 들어가 계획에 없던 하루를 더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매일매일 매시 매분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다.
하여, 여기에 올린 두서없는 사진 외에 더 훌륭한 편액과 현판이 한옥마을에 몇십 배는 더 많으리라는 걸 분명히 하고 싶다. 다음에 또 가서 더 찾아보고 즐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은 일단 해본다).
또 하나. 전주 한옥마을과 서예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아래에 <데일리 전북>에 난 관련 기사를 올렸다. 어느 모로 봐도 전주는, 그리고 한옥마을은 멋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