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란 무엇인가

# Bashing 2

볕좋은마당 2023. 2. 12. 23:10

앞의 글 <# Bashing 1>에서는 '10년 영어를 배워도 외국인 앞에서는 입도 벙긋 못하는' 영어 교육을 비판하면서 뒤로는 잇속을 채우는 데 골몰했던 자칭 '1등 신문'에 얽힌 얘기를 늘어놓았다. (명토 박는데, 근거는 없다. 이런 시시한 글로 거대 권력에게 시달리긴 싫다.) 이 글에서는 우리가 중고등학교에서 받은 영어 교육의 실상과 함께 사회적 생존을 위해 회화를 배운 배경에 대해 알아보겠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도 영어 교육에 대한 Bashing은 사그라들지 않았고, 어느덧 그런 일이 '국민스포츠'가 된 느낌이었다. 언론이 그렇게 국민들의 회화 능력을 걱정했다면 그걸 가능케 할 방안을 제시했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Washback Effect(역류효과)를 통해 개선하겠다면 대학 입시에서 어떻게 회화 능력을 측정할 것인지, 아니면 효율적인 말하기 교육을 위해서는 수업 당 인원을 몇 명으로 해야 하고, 그러려면 교실 환경을 개선해야 하고, 원어민 교사는 어떻게 공급하여 활용하고... 등 제안 거리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대안 제시는 없었다. 언론은 '10년 영어를 배워도...' 류의 클리셰(Cliche)만 반복하는 앵무새였고, 이에 덧붙여 영어 회화 능력이 부족한 교사에 대한 Bashing도 만연했다. 이런 비난이 대중에게 통했던 이유는 당시의 성인 대부분이 1970~1980년대 또는 그 이전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에 있다. 그 시절엔 원어민의 발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으므로 영어 선생님의 '선창'을 따라 읽으며 발음을 체득하는 수밖에 없었다. 가끔 읽기 연습이라도 시키면 다행이었지만 그냥 죽도록 단어 외우고 문법 익히고 독해하는 게 영어 공부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의 경우라고 다르지 않았다. 1970년대 중반에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알파벳 필기체니 인쇄체니 하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엔 당연히 문법과 독해에 집중했다. 당시 영어 선생님들의 선생님은 일제강점기에 영어를 배웠고, 모두 알다시피 그런(?) 영어를 물려받은 우리의 선생님들은 원어민은커녕 카세트테이프도 없던 시기에 외국어를 익힌 분들이라 우리가 그 세대로부터 회화 능력을 이어받는 건 무리였다. 심지어 고3 때 선생님은 교과서 아래의 신출 단어를 따라 읽으라면서 병기된 발음기호와 딴판으로 읽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 (이건 정말로 고민 & 고통스러웠던 기억이다. 발음이 딴판인 정도가 아니고 그냥 안드로메다로 간 거다. 액센트 위치까지 틀린 걸 복창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고, 발음기호에 맞게 읽자니 나 혼자 튈 테고, 그러다 '넌 인마 뭐야'라며 걸리기라도 하면...)

교실 안 사정이 이랬지만 그분들만 탓할 수는 없다. 말하기가 중시되지 않았을 때였고 국가 차원의 회화 교육이 불가능했던 '시대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졸업 후 생존을 위한 각자도생을 해야 했다. 회화학원에 다니거나 'OO 생활영어' 같은 테이프를 듣거나, 세월이 좀 더 흐른 뒤의 세대는 큰돈을 들여 영어 사용 국가에 언어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모두들 이것을 '어학연수'라고 하는데, 잘못 쓰는 말이다. 어학(Linguistics) 또는 언어학은 음성학, 형태론, 의미론, 통사론, 화용론 따위를 포함하는 학문이지 회화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듣고 말하는 기능을 익히려는 목적이지 이런 학문을 탐구하러 연수를 간 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므로 딱 맞지는 않아도 어학 연수가 아니라 언어 연수(Language Training)라고 하는 게 낫다.) 이렇게 국가의 직무 유기로 인한 추가 지출과 시간 투자는 오롯이 개인이 감당할 몫이 되었고 일을 이렇게 만든 학교와 영어 수업, 더 좁게는 영어 교사에 대한 비난은 전 국민의 술자리 오징어 땅콩이 되어갔다.

각자도생에 대해서는 나의 사례도 엇비슷하거나 조금 나은 정도다. 그나마 고1, 2 때 배운 선생님은 탁월한 회화 능력자여서 매시간이 재미있었고, 매일 아침 5시 50분 라디오에서 10분 동안 나오던 '민O철 생활영어'는 지방의 고교생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영어영문학과 진학 후 커리큘럼에 회화가 있긴 했지만 털어지지 않는 아쉬움으로 친구들과 회화를 배우러 다니기도 했다. 한참 뒤 대학생들 사이에 휴학을 하고 영어권 국가에 언어 연수를 가는 붐이 일기도 했으나 그럴 여건이 안 됐던 당시엔 경쟁률 높은 시험을 통해서라도 KATUSA로 병역을 마치는 길을 택하기도 했다. 미군 수송부대의 Company Clerk(중대 행정병)으로 일한 덕에 영어를 사용할 기회가 다른 부대원들보다 더 많기는 했다. 군 생활을 영어로 하니까 KATUSA만 되면 회화를 엄청 잘할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현실은 많이 다르다. (여기에 대해선 다음에 상술할 기회가 있겠다.) 졸업 뒤 어느 회사에 들어가서는 해외 업무를 영어로 해야 했고, 개인적 친분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나 놀던 미국인도 있었다. 이 정도가 인문계 고교의 교사가 되기 전의 약술(略述)인데, 사람에 따라 더 많거나 적은 언어적 배경과 회화의 경험이 있을 수 있겠다. 이렇게 우리 세대의 20대 이후 영어의 체험은 각자 다르지만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의 학습 경험이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다.

유럽 국가들, 특히 북유럽 사람들의 영어 회화 능력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회사에 다닐 때 독일 거래처의 부사장이 부인을 동반하고 방문해서 내가 접대를 한 적이 있었다. 경제학 박사라는 남편이 직업상의 이유에서라도 영어를 잘하는 건 당연하다 치고, 자신이 고졸이라던 부인이 조곤조곤 유연하게 말하는 건 신기했다. 유창한 영어를 어디서 배웠냐는 나의 질문은 '고등학교에서 다 배우는 거 아닌가'라는 부인의 답에 곧바로 우문(愚問)이 되고 말았다. 그 순간의 당황과 부러움이 지금도 생생하게 전해오는 것 같다. 파고 들어가면 결국 우리 사회의 시스템까지 얽힌 문제가 되겠지만, 영어 회화만 떼어 본다면 우리가 청소년기에 절실했던 훈련을 받지 못한 건 어쨌든 안타까운 일이다. 

 

국민들이 회화 능력을 갖추려는 노력은 학교에서 채워주지 않은 것을 단순히 만회하는 차원을 넘어 사회인으로서의 생존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선 적지 않은 자원과 시간을 쏟아야 했으니, 모두의 원망이 학창 시절의 영어 시간에 집중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잘하면 좋을 것 같았던, 그래서 누구나 해보길 꿈꾸었던 회화는 언감생심, (지나친) 문법, (일본식) 발음, (어려운) 단어들을 억지로 외웠던 일만 생각났을 테고, 일부 언론의 때맞춘 Bashing으로 공통의 표적지가 눈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 Bashing 3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