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저널> 2003년 1월호에 실린 아포얀도에 대한 글. 27년 간 듀엣 파트너로서 부족한 나와 같이 놀아 준, 하늘에 돌아간 지 벌써 5년이 된 고 최성우가 썼다.
(크게 보려면 클릭!)
* 사진을 확대해도 글자가 잘 안 보인다는 고견이 있었다. 현대 문명(!)에 기대어 텍스트를 추출했다.
- 글에 앞서 양해의 말씀
필자가 이 원고를 완성하기 직전, 국내 최대의 기타 애호가 인터넷 사이트인 기타매니아에서 우연찮게 아포얀도의 쇠퇴에 관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할 기회가 있었다. 몇몇 애호가 분들께서 반론을 제기해 주셨다. 아포얀도의 퇴조기미는 전혀 느껴지지 않으며, 전공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도 그런 얘기가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의아했다. 필자는 물론 기타전공자는 아니며, 조금 극성스런 애호가로서 발매되는 음반을 통해 세계 기타계의 흐름을 짐작할 뿐이다. 음반을 통해 아포얀도의 퇴조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알 아이레주법만을 사용하는 기타리스트라도 한 곡에 한두 음 정도는 아포얀도 사용이 감지되기는 한다. 따라서 이 글에서 아포안도 비사용자라고 일컫는 기타리스트는 가령, 서정적인 주 선율에서도 알찬 알 아이레로 서주 선율을 충분히 소화해 내어, 굳이 아포얀도 주법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기타리스트를 의미함을 독자제현께서 알아주시기 바란다. 곡 해석에 무리가 없다면 굳이 아포얀도, 알 아이레를 가지고 논쟁을 할 필요가 무어 있겠느냐는 이야기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에는 기타로 연주되는 아포얀도에는 우리가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만한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고 느껴 본고를 쓰게 되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고, 만약 필자가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면 (아포안도의 앞날이 전도양양하다면) 어설픈 아마추어의 주제파악 못하는 잡설이었거니 하고 웃어 넘겨주시기를...
기타의 오른손 주법에 있어 탄현한 손가락이 아래 현에 가서 닿도록 탄현하는 방법을 '아포얀도'라고 하며 그렇지 않고 탄현한 손가락이 그대로 공중에 머무르게 하는 주법을 '알 아이레' 라고 함은 기타에 입문 시 누구나 가장 먼저 배우는 내용이다. 비교적 이전 세대의 기타리스트들이 알 아이레 주법을 위주로 하되, 아포얀도 주법을 곡의 곳곳에 적절히 추가해서 사용해 왔으나, 70년대 이후의 신세대 기타리스트들은 알찬 알 아이레 주법으로써 아포얀도 못지 않은 충실하고 단단한 음색을 얻어낼 수 있다하여 알 아이레 주법으로만 연주하는 것을 선호해 왔으며, 이러한 경향은 갈수록 심화되어 가고 있다. 현대 기타에 있어 아포얀도의 몰락은 수많은 대가들의 진지한 음악적 탐구의 결과로서 유도되는 당연한 결과임을 필자도 인정하나, 한 사람의 기타음악 애호가로서 지난 세대의 노 대가들이 구사했던 멋진 아포얀도의 매력을 요즘의 전공생들은 충분히 맛보지 못하는 것 같아 일면 안타까운 마음도 있 다. 아포얀도가 외면되어 가는 이유에 대하여 한번 심도있게 고찰해 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기타 학습자들이 선생님으로부터 `알 아이레로도 아포얀도 소리 낼 수 있으니 아포얀도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듣고는 그런가보다 하는 것 보다는 이 글에서 필자가 제시한 내용에 대해 한 번쯤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다음의 내용은 아마추어 애호가로서 내놓은 하나의 생각일 뿐으로, 음악적 지식의 빈곤함이나 충분하지 못한 이해로 인한 오류가 발견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읽으시는 독자들의 양해를 구할 뿐이다.
아포얀도, 무엇이 문제인가
1. 딜레마 - 아포얀도를 사용하는 순간 곡의 조형미는 무너진다.
우선 인정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다. 알 아이레로는 절대로 아포안도와 ‘똑같은' 소리를 낼 수 없다. 이 말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실 분들이 많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어쨌든 완전히 '똑같은'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은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문제는 자못 심각하다. 모든 악기들은 고유의 음색을 가지고 있다. 여러분들이 머릿속으로 피아노, 바이올린, 클라리넷...등등을 떠올려 보라. 나름대로 떠오르는 음의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그럼 기타소리를 한번 떠올려보면 어떨까? 기타를 배우지 않은 여러분들이 쉽게 즉각적으로 떠올렸을 소리가 바로 알 아이레의 소리일 것이며, 기타를 배워 아포얀도를 익힌 경험이 있는 여러분들은 아 마도 두가지 이상의 소리가 떠올라 약간의 혼란스러움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즉, 기타에 있어 아포얀도는 마치 다른 악기의 소리와도 같은 전혀 다른 의미로 연주자들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기타 독주곡에서 아포안도를 사용할 경우 작곡자가 의도한 독주 악기를 위한 곡이 아닌, 2중주, 또는 그 이상의 합주곡의 효과를 내며, 이것은 다른 악기로 연주되는 독주곡에서와 같은 음색의 통일성을 기본으로 구축되는 곡의 정교한 조형미를 해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 다. (베토벤이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 라고 한 말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 기타의 한계를 아프게 지적하기도 한 말이라고 본다) 고전~낭만시대의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들, 예를 들면 소르, 코스트, 타레가 등은 음량이 작은 기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색채감 넘치는 독주곡을 많이 작곡하였고, 당연히 그들 자신이 피아노 소나타나 바이올린 파르티타 등과는 그들의 독주 작품에서 원하는 내용이 달랐으리라 추측하며, 이러한 곡에서 아포얀도를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작곡자가 원하는 내용을 일정 부분 잃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현대 기타에 있어서는 기타를 모르는 작곡가의 기타 작품도 많이 나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바로크시대나 고전시대의 다른 악기를 위한 곡의 편곡 작업이 많이 이루 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작품의 경우, 독주곡의 의미에 충실하기 위해서 알 아이레 주법으로의 통일은 설득력을 가진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러한 방향의 최첨단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이 Paul Galbraith일 것이다. 일반 고전음악 애호가들이 필자에게 기타로 연주되는 Bach의 음반을 추천해 달라고 할 경우, 거의 예외 없이 필자는 Galbraith의 음반을 추천한다. 그의 음악이 일반 애호가들의 입맛(귀맛?)에 위화감이 없으리란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유럽의 미식가 클럽에 삭힌 흑산 홍어회를 선물할 수는 없으니까. Galbraith의 음악적 성취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기타 애호가 중 일부는 그의 위업에 감격한 나머지 현대 기타는 그가 제시한 방향으로(다현 기타) 진화되어 가야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분들도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의 연주를 듣고 난 뒤, 필자의 솔직한 느낌은 조금 죄송스럽지만 '이런 음악을 하려면 왜 굳이 기타를 선택했을까?'하는 생각이었다. 기타 전공자 한 분과 이런저런 얘기 도중 Galbraith 말로 천재 중의 천재며 모든 기타음악의 가야할 길을 밝힌 선구자..등등의 극찬을 멈추지 않는 그에게 필자가 물었다. ’갈브레쓰가 타레가의 아델리타를 연주한다면 어떨까요?' 했더니 그분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굳은 얼굴로 답하였다. '엽기적인 아델리타가 나올 것 같다.‘ 그러는 것 아니겠는가. 아직 성급히 결론을 내리기엔 따져볼 문제가 많다고 본다. 세계적인 거장 아우셀 (R. Aussel)이 내한했을 때, 전공생 한 명이 문하에서 배우고 싶다는 의견을 비친 적이 있었다는데, 그의 대답은 '아포얀도를 포기하면 받아주마'라는 취지로 얘기를 했던 모양이다. 필자같은 문외한이 아우셀같은 대가의 깊은 뜻을 모두 이해하기는 애초에 그른 일이긴 하나, 한 마디 여쭙고 싶은 말도 있다. '아우셀 선생, 당신 하모닉스나 피치카토, 탐보라 같은 거 절대 안 쓰는 것 아니지 않소. 아포얀도도 그렇게 경우에 따라 사용하는 특수주법 정도로 보아 주실 수는 없는가요?'라고 말이다.
2. 아포얀도로 연주되는 스케일의 의미는?
이것은 필자의 주관이 조금 강하게 개입된 생각이라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할까 한다. 이러한 생각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받아주시길. 기타곡에서 긴 스케일이 등장하는 패시지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몇몇 대표적인 예, 짧은 스케일이지만 소르의 마술피리 변주곡의 제1 변주 초반의 B7 화음 후의 상행 스케일 같은 경우(완전히 똑같은 패시지가 파가니니의 A장조 대소나타 1악장 초중반에도 나온다) 아포얀도 연주는 영 거북스럽게 들리는 것이 필자의 감각이다. 그러나 Coda 이후 곡의 종지 직전 여섯 잇단음표의 상행 스케일은 역시 아포얀도가 '조금' 더 어울린다고 느낀다. 이러한 결벽증은 로드리고의 작품으로 넘어오면 더욱 심해지는데, 로드리고의 작품에는 상당히 긴 스케일이 많이 등장 한다. 유명한 'Invocation et Danse'를 보면 Invocation 부의 끝에 마치 물결치듯이 올라가는 음계 연주 부분이 있다. 이 부분에서는 해석에 따라 알 아이레/아포안도 모두 사용될 수 있다고 느껴지는 반면, 그의 또 하나의 걸작인 'Un tiempo fue ltalica famosa 종료 직전 나오는 3옥타브를 세 번 오르락내리락 하는 긴 스케일은 도저히 아포얀도 아니면 안 되겠다고 느끼는 것이다. 위에 열거한 예에는 어떠한 음악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필자의 얇은 귀가 변덕을 부린 것일까. 필자의 생각은 이렇다. 필자는 독주곡을 듣고 분석할 때, 이 곡을 오케스트라로 편곡한다면 어떻게 표현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 하는 습관이 있는데,(이 방법은 후쿠다 신이치의 마스터클래스 때 역시 그도 자주 생각하는 내용이란 얘기 듣고는 으쓱했던 적이 있다) 아포얀도가 어울린다고 느꼈던 스케일 부는 오케스트라의 총주(투티)가 어울린다고 느꼈던 부분이 었던 것이다. 아포얀도로 스케일이 연주될 때. 단순한 강조가 아닌, 오케스트라의 총주로써 유도되는 종지(Cadence)를 향하는 듯한 곡 해석상의 의미를 내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당연히 스케일 부의 아포얀도 사용은 연주자의 신중한 해석 후 사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 하나의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바로 아포안도 스케일은 기타의 깊숙한 저 내면에 숨어있던 문제 - 플라멩코의 현현이라고 생각한다. 플라멩코의 정서란 무엇인가. 아마도 클래식(좀 거칠게 말해서 지금부터 2 ~300년 전에 지구촌의 독일이란 곳에서 유행했던 음악)과 정반대되는 속성들이 여럿 잠재해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멩코의 라이브를 보신 적이 있는지. 대단찮은 길이의 스케일을 불꽃 튀기듯이 두들겨 쳐대는 아포안도를 보면 가슴속에 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플라멩코는 불가사의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강력한 아포얀도 스케일의 마력은 참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빠르다는 파코 데 루치아의 스케일이라 하더라도, 피아노나 하프로 연주한다면 고등학교 전공생 정도면 쫓아 칠 수 있을 정도의 스피드 아닌가. 하지만 플라멩코 음악의 스케일을 피아노나 하프로 연주한다면 또한 어이가 없을 정도로 음악이 썰렁해질 것이다. 무엇 때문일까? 아포얀도 스케일은 연주자의 테크닉 과시의 측면이 분명히 있다. 아무나 하지 못 하는 것이다. 관중을 열광시키는 데 그 이상의 도구는 없다. 그리고 이것은 엄격한 자기 절제가 미덕으로 상당 부분 작용하는 고전음악 세계(최소한 바로크~고전시대)에서는 천박한것으로 치부되기 쉬웠으리라. 그리고 기타로 연주되는 아포얀도 스케일에서는 도레미파도 모르는 천한 집시들의 음악 - 바로 플라멩코가 느껴지는 것이다. 많은 음악가들은 피레네 산맥 남쪽의 이국적 풍물에 매료되어 스페인을 주제로 한 수없이 많은 환상곡과 광시곡들이 작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정황으로 보아, 그들은 마치 인종 차별처럼 스페인의 정서를 유럽의 주류 음악에 편입시키기를 꺼려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앞서 예를 들었던 아우셀의 '아포얀도 포기해' 하는 말에서 음악적인 필연성에서 나온 충고라기보다 아포얀도로 대변되는 '스페인' 에 대한 경멸도 일정 부분 포함 되어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으신지. 현대 기타에서 페페 로메로의 위치가 과연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시는가. 기타는 스페인이 종주국이다. 스페인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나라의 기타리스트들이 알 아이레 주법으로 통일되어 가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기타라는 이 놓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악기에서 스페인 색을 떨쳐내고자 하는, 그래서 유럽의 주류 음악계에 편입되고 싶어하는 심정의 일단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문제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느끼는 것은 과연 필자의 과대망상일까?
- 글을 닫으며 -
연주라는 행위의 본질중 하나가, 작곡자의 의도를 충실히 재현하되, 연주자의 개성을 실어 음악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이라면 굳이 아포얀도', 알 아이레', '티란도', '뻬가르'등등 주법을 분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음악을 위해서 연주자는 연주라는 행위에 전권을 가지되,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면 될 것이다. 필자는 다른 악기에도 이러한 경우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기타에 있어 줄을 튕긴 손가락이 그 밑의 줄에 닿고, 안 닿고의 문제가 '음악을 위해서'라는 말로 가볍게 재단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물증은 없는 심증을 가지고 있어 왔으며 이러한 생각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지면에 공개하게 될 기회를 갖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벌어지는 모든 일상사는 나름대로 필연적인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아포얀도의 쇠퇴는 어쩔 수 없는 대세임을 필자는 느낀다. 그것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질주해 가는 현대 과학문명에 대해 끊임없는 비판의 소리가 있지만 멈출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본다. 지금껏 피력한 필자의 의견에 대해 전문가로서 호된 비판의 의견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그러한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며, 토론의 장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기타를 끌어안고 한 음 쳤을때 뒷판의 울림으로 가슴에 전해지는 아포얀도의 아름다움... 그것은 이 둔한 음악 문외한에게 평생 기타를 놓지 못할 한 가지 동기부여를 해 주었던 것이다. 스러져 가는 아포얀도에 대한 오마주(hommage)정도로 여겨주시기 바라며, 졸고를 마친다.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린다.
최성우 / 한국기타협회 이사, 본지 편집위원
'SoSo한... > 탐구 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Sharon Isbin 인터뷰 (0) | 2014.08.14 |
---|---|
<퍼온 글> 아마추어기타 연주 단계 (0) | 2014.07.11 |
알리앙스 줄 분류 (9종) (0) | 2014.03.12 |
악보사이트 링크 (0) | 2014.03.03 |
연주자들의 사용 악기 (0) | 2014.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