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락치기란 이런 것...
5월 어느 금요일 저녁, 선생님의 갑작스런 전화 - "국전에 하나 써서 내세요. 월요일 마감..."
유난히 업무량이 많았던 올해 봄... 그래선지 학기 초에 몸살에 두드러기에 고생좀 했다. 쉬어 볼 요량으로 그렇잖아도 4월 한달은 서실을 제꼈던 터. "어떻게 국전에 내요. 연습도 안 했는데." 나의 당연한 반응.
/그/러/나/
"원래 느닷없이 내는 겁니다. 우리도 느닷없이 태어났잖아요..."
허걱~! 그래서 '느닷없이' 쓰게 됐다. 규격에 맞는 종이(국전지)도 없어서 토요일 오후에 인사동에 전화. 결국 오토바이 택배로 종이를 받았다. 살다살다 퀵서비스로 종이를 사보기도 처음.
일요일에 좀 끄적거려 봤으나 신통치 않은 건 당연.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일정도 좀 알아 놓고 준비도 해 보는 건데 이게 뭐람. 에이, 그냥 포기할까 생각도 하다가 이렇게 번갯불에 콩 튀기는 것도 경험이 될 것 같아 그냥 가기로 했다. 그렇다고 글씨가 갑자기 잘 될 리는 없지만... 선생님은 이런 말씀도 하셨다. "먹물도 안 마른 작품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헤어드라이어로 말리기도 하지요."
일요일 밤엔 서실에서 마쳐보려 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 결국 다음 날을 기약하며 기진맥진하여 집으로 향했다. 마침 시험기간이라 월요일 오후 서실에 간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나름 좋은 종이와 남들이 좋다고 하는 먹물을 언제 써 봤어야 말이지. 적응하기 영 어려운 거다. '헝그리 정신'으로 평소에 너무 싼 종이와 먹물만 쓰다보니 이런 일이 생기고야 만다. 그러게 가끔은 럭셔리한 재료도 폼나게 소비해 주는 객기(!)도 좀 부릴 필요가 있다. 어쨌든 글씨는 둘째 치고 재료에 적응하기도 빠듯한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선생님이 오신 4시경에도 별 성과는 없었다.
접수 마감은 5시! 결국 4시 30분에 후다닥 마친 것을 내기로 했다. 진작에 써 놓았어야 할 출품원서를 그제야 나는 허겁지겁 쓰기 시작했고, 선생님은 옆에서 '헤어드라이어'로 말리셨다. 말로만 들었던 남의 일이 나에게 일어나다니... 이 아니 영광인가! ㅡ.ㅡ;;
얼마나 급하게 했으면 낙관 도장을 찍다가 튕겨져서 인주가 묻었다. 그거 지워보겠다고 지우개로 문지르다 구멍이 나질 않나, 아래쪽에는 바닥에 묻었던 먹물이 옮겨 묻질 않나... 이게 뭔 Dire Situation! (위의 사진 중 아래 것이 바로 그 순간의 참상을 말없이 웅변한다. ㅜ.ㅜ)
후다닥 차를 몰고 대학로 예총회관으로. 시간은 좀 지났지만 선생님이 내 것을 포함한 서실 다른 분들의 작품을 챙겨 접수하셨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들이라 이렇게라도 차근차근 복기하지 않으면 기억도 안 날 거다.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오래 전부터 준비했으면 긴 시간 낮은 수준으로 지속되었을 스트레스의 양을 1박2일의 짧은 시간에 높은 수준으로 압축되어 겪었다. 이래저래 총량 불변의 법칙인가?
이런 생각을 했다. 기대하지도 않지만 혹 입선에라도 든다면 둘 중 하나 - 내가 천재거나, 국전 심사가 엉망이거나. 근데 하나는 분명하지 않은가. 난 천재가 아니라는 거. 더구나 내가 쓴 걸 한 번 펴보지도 못하고 낼 정도의 날림작(!)은 분명한 사실이니...
결국 세상의 정의는 살아 있었다. 음... 나의 욕심보다는 그것에나마 위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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