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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bidexterity, 양손잡이

볕좋은마당 2021. 10. 13. 23:04

"인간은 유연한 동물이어서,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존재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Man is a pliable animal, a being who gets accustomed to everything!" - Fyodor Dostoevsky
 
몇 달 전부터 익숙해지려는 시도:
 
1. 왼손 마우스 (윈도우 설정의 왼손 마우스는 아니므로 마우스의 왼쪽 클릭은 왼손의 중지로...)
2. 왼손 젓가락질
   2-1. 왼손 양치질
3. 왼발 브레이크
 
1. 왼손 마우스
 
오른손 i 손가락에 문제가 생겼다. 탄현 후 복귀가 느려진 거다. i-m-a로 아르페지오를 할 때 속도가 붙으면 탄현이 끝난 i의 손톱 윗면이 아랫줄을 건드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딩-딩-딩이어야 할 소리가 딩-틱-딩이 되어 버린다.
 
결국 손가락에도 노화가 오고, 나이 들어가면서 아르페지오부터 망가진다고 생각했다. 천하의 세고비아도 80대라는 고령의 영상에선 아르페지오가 거슬리던데, 나도 그 길을 가는 건가? 연습하고 녹음할 게 아직 많은데 이대로 세월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마뜩잖았다.
 
그런데 왜 하필 i인가.
 
거슬러 생각을 해봤다. 이게 다 코로나19 탓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2020년은 3월 개학 때부터 엉망이었다. 등교 중단 조치가 있었고, 부랴부랴 온라인 수업을 시작했다. 인류 역사 이래 단절 없이 지속된 대면 수업이 느닷없이 온라인으로 옮겨가면서 현장은 혼선 그 자체였다.
 
급한 나머지 앞뒤 안 보고 시작한 영상 강의였다. 늘 하던 식으로 교단에서 설명하는 모습을 캠코더에 담아 영상으로 만들어 올리는 선생님, PDF를 띄우고 그 위에 필기하며 설명하는 영상을 만드는 선생님,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설명하는 음성을 넣어 올리는 선생님 등 혼란 속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했다.
 
나는 파워포인트를 택했다. 일일이 만든 슬라이드를 넘기며 설명하는 영상을 만드느라 하루해가 어떻게 저무는지 모를 정도였다. 사달은 여기서 났다. 한 번 쓰고 말 건데 굳이 '고퀄'로 만들 필요가 있냐는 말도 들었지만, 이왕 하는 건 최선을 다하자는 평소 신념이 결국 문제를 일으켰다. 겨우 한 시간 쓰려고 만드는 슬라이드가 100장을 훌쩍 넘는 일이 반복되었다. 슬라이드마다 일일이 폰트를 다르게 하고, 애니메이션 효과 주고, 도형도 줄줄이 넣었다. 이런 과정엔 마우스 클릭을 수천 번 넘게 하는 '노가다'가 동반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클릭질을 거의 오른손 검지(i)로, 그것도 너무 많이 한다는 데 있었다. 손가락 i의 이상을 느끼고 나서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행히 2021년엔 그 전 해처럼 학생들이 집에서 시간 날 때 영상을 보는 방식이 아닌, MicroSoft가 제공하는 Teams라는 화상회의 프로그램을 통한 실시간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여름 방학 중에 3학년 학생 전체가 백신 접종을 받으면서 전면 등교가 시작되었고, 2학기 들어선 모든 학년이 예전의 수업 방식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PowerPoint 작업에서 해방되면서 1년 간의 i 손가락 혹사는 막을 내렸다.
 
늦게나마 마우스를 책상 왼쪽으로 옮겼다. 누구든지 해보면 안다. 마우스를 왼손으로 쓰는 게 얼마나 어색하고 불편한지. 처음엔 화면의 아이콘 하나에 맞춰 클릭하기도 힘들었다. 아이콘에 대고 더블클릭도 잘 못하는 '신세계'를 체험하고 나면 노인들이 복지관에서 컴퓨터를 배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해하는 뜻밖의 효과도 있다. 뒤늦은 시도라 많이 서툴지만 인간은 적응하는 동물! 몇 달이 지나니 오른손의 95% 수준으로 왼손 마우스를 쓰게 되었다.
 
2. 왼손 젓가락질
 
속담이나 격언의 범주에 들지는 않지만 '왼손잡이는 고집이 세다'는 말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건 사람들을 미혹하는 대표적인 비과학이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말이 안 되는 비과학으로 '혈액형에 따른 성격 유형 분류'도 있다. 혈액형에 따라 성격이 나뉜다는 믿음은 일본에서 생겨나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거의 전 세대에 걸쳐, 그것도 거의 매일 전 국민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 혈액형을 분류하는 방식이 한두 가지도 아닌데 그냥 (단순하고 만만한) ABO식 분류만 들어 왈가왈부하는 거다. 그런 절대적인 기준이 가능하다면 Rh+나 Rh-인 사람은 도대체 성격이 어떻게 나뉜다는 걸까? (이 주제는 부당한 차별의 문제까지 확장될 수 있어서 할 말이 좀 있지만, 일단 여기까지.)
 
이것 말고도 전자레인지에 음식을 데우면 기가 빠져나간다는 둥, 선풍기를 켜놓고 자면 죽는다는 둥, 게르마늄 팔찌를 하면 혈액 순환이 좋아진다는 둥, 옥장판에서 뭐가 나온다는 둥, 우리 주변의 비과학은 나열하기에도 벅차다. 건강이 안 좋아질수록 귀가 얇아져 어설픈 논리에도 솔깃해지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근거 없는 설에 쉽게 마음을 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국민의 문맹률이 낮은 게 자랑이 아니라 문해력이 떨어지는 현실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는다면 '과학의 대중화'니 '대중의 과학화'니 하는 수사(修辭)가 무슨 소용인가.
 
다시 왼손잡이 얘기로 돌아가자. 봄부터 왼손으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났는데도 오른손 젓가락질의 약 90% 수준을 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너무 오래 오른손만 썼다는 반성이 절로 일었다. 집에서보다 바깥 식당에서 먹을 때는 또한 색다른 '발견'을 한다. 적어도 중장년층 이상에서는 왼손으로 젓가락을 쓰는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거다. 왜일까. 요즘엔 글씨 쓰는 것은 물론 밥도 왼손으로 먹는 젊은이들이 제법 있는데, 그렇다면 유독 최근에 왼손잡이가 늘어난 걸까? 수백만 년 동안 오른손만 쓰던 인류가,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갑자기 양손잡이로 진화하고 있다는 말인가? 당연히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없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왼손으로 글씨 쓰는 서양인들은 꽤 있지만, 그런 일이 드물던 특정 민족에게 이제 와서 왼손잡이가 많이 늘어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정답은 '오른손'이라는 말 자체에 있는지도 모른다. 오른손은 '옳은' 손이기도 하다는 데서 결론을 유추할 수도 있겠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영어도 'Right' hand고 스페인어도 La mano 'derecha'다. (mano는 손, derecha는 direct, right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류는 오른손을 써야만 하는 종으로 정해진 듯하다. (인터넷 검색을 조금만 해봐도 유전의 관점에서부터 동물의 성향에까지 망라해 오른손잡이, 왼손잡이에 관한 논란은 차고 넘친다.)
 
나이 든 세대는, 왼손잡이로 태어났다면 어린 시절 밥 먹을 때마다 부모의 걱정과 꾸지람을 들었을 것이다. 집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결국 강제로 '교정'을 당하고 나서야 글씨 쓰기와 밥 먹는 일만큼은 오른손으로 하게 된 것이다. 나의 누님과 형님 중에도 왼손잡이가 계신데 역시나 젓가락질과 글씨 쓰기는 오른손으로, 다른 일은 왼손으로 하신다. 어쩌다 왼손으로 칼질하시는 모습을 생소하게 느낀 이유는 밥상에서만큼은 항상 오른손 쓰시는 것만 보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왜 왼손잡이인데 밥은 오른손으로 먹을까'라는 질문에 달린 댓글이 '오른손을 쓰도록 교정당해서'였다. 읽는 순간 쓴웃음이 나왔다. 예전엔 아이가 왼손을 쓰지 못하게 붕대로 감거나 심지어 때리면서까지 밥만큼은 오른손으로 먹도록 하는 부모들이 많았다. 현재 기준으로 보면 아동학대라 해도 할 말이 없겠으나, 그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때는 '그래도 되는 줄 알던 시대'였다. 그러니 이런 일로 당시의 부모님들을 비난하는 건 좀 야박하다는 생각도 한다.
 
논리를 조금 비약해서, 노예제도의 잔혹함을 알고 나면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었냐고 비난할 만하다. 그런데 현재의 공장식 축산을 두고 어떻게 그렇게 동물을 학대할 수 있었냐고 후세 사람들이 현재의 우리를 비난하는 상상도 해보자. 노예제도와 공장식 축산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때의 상황을 조금만 인정하고, 시대의 한계에 갇혀 살았던 당시의 갑남을녀에게 그만큼의 연민을 가지면 괜한 분노가 불타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다.
 
어떤 시대든 동시대인들이 옳다고 공유한 가치가 있었다. 갈수록 왼손잡이임이 분명해지는 자식을 보는 부모에겐 오른손잡이에게만 편리하게 된 세상으로 왼손 쓰는 아이를 밀어 넣지 않겠다는 선의가 있었다고 본다. 당시의 무리수가 요즘 기준으로는 부당한 압박이나 학대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분들은 그저 당시에 공유했던 가치의 바다에 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야 '왼손잡이는 고집이 세다'는 세간의 말을 이해했다. 그런 압박에 시달리고도 젓가락질에서까지 '완전한 왼손잡이'로 살아남으려면 얼마나 고집이 세야 하는가. 웬만한 강요와 탄압은 물론 간혹 있었을지도 모를 학대까지도 견뎌낸 것이다! 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 동아리 여자 후배가 완전한 왼손잡이다. 그것도 주변에서 본 적이 없는, 무려 50대의 왼손 젓가락질이라니!
 
고집이 세서 그랬다면 천하의 옹고집일 텐데, 그게 아니라는 게 함정이다. 70대의 남자라면 거의 모두에게 본능처럼 새겨진 마초성이라고는 없는, 심지어 손수 요리를 해서 딸 셋을 포함한 온 가족을 거두어 먹이시는 아버지를 둔 덕분이다. 이 정도로 열린 분이니 당연히 딸에게 오른손을 강요하지 않았을 테고, 그래서 나는 왼손으로 밥을 먹는 50대 아줌마라는 희소하고도 반가운 장면을 보게 되었다.
 
내가 왼손 젓가락질을 시작한 건 글자 그대로 '내친김에'다. 왼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면서 어차피 하는 김에 젓가락질도 왼손의 영역으로 확장한 거다. 시작하면서 여러 깨달음이 뒤따랐다. 우리가 평소에 익숙한 동작을 할 때는 단 한 번이라도 작동 원리조차 생각해 보지 않는다는 점이 그 첫째다. 24시간 숨을 쉬면서도 기도로 들어간 산소가 어떤 기제로 우리 몸을 살아가게 하는지 하루 내내 잠깐이라도 궁금해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막연하게 젓가락 두 개가 이등변 삼각형의 빗변이 되어 동시에 오므려지는 것으로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왼손으로 젓가락을 옮겨 쥐기는 했는데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갑자기 막막해졌다.
 

당연한 말이지만 해답은 오른손에 있었다. 젓가락질의 동작과 원리를 찬찬히 살피며 거울로 보는 것처럼 정확히 왼손으로 대칭되도록 흉내 내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뜻밖에도 젓가락은 두 개가 다 움직여 오므려지지 않는다. 두 젓가락의 한쪽을 A, 다른 쪽을 B라고 하면 A는 엄지와 검지 사이 부드러운 살에 끼워져 중지 위에 놓이고, B는 약지의 손톱 바로 위 살에 고정된다. 이렇게 B가 단단히 고정된 채 A가 검지, 중지 각 관절의 운동으로 아래위로 움직이면서 오므려 물건을 집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젓가락'으로 구글링 하니 젓가락질하는 법이 쏟아져 나온다. 그만큼 젓가락질을 제대로 못 해서 타박을 받거나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많다는 걸까.)
 
예상했듯이 왼손 젓가락질은 생경(生硬)하고, 어설프고, 어눌하고, 어색하다. 50년이 넘게 오른손으로만 한 일을 하루아침에 왼손이 똑같이 잘하기를 바라는 게 가당키나 한가. 겨우겨우 젓가락 두 개는 손에 쥐었지만 뾰족한 끝을 맞추기도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논산 훈련소에서 사격하던 기억이 떠오르며 '영점(零點)'이라는 단어가 계속 아른거리기도 했다. 손가락뿐만 아니라 올리고 내리는 왼팔조차 내 몸이 아닌 듯했고 음식도 남이 떠먹여 주는 느낌이었다.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다가도 부침개를 찢어 나눌 때처럼 오므리는 반대 방향으로 젓가락을 펴야 할 때는 여전히 난감하다. 이럴 때마다 한 인간의 삶 전체에 걸쳐 몸의 한쪽만 너무 썼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앞으로 수개월이 가도 이렇게 진척이 더디면 수년이라도 계속할 수밖에....
 
2-1 왼손 양치질
 
왼손 칫솔질은 왼손 젓가락질의 부록이다. 젓가락질을 바꾼 김에 칫솔질도 왼손으로 바꿔보기로 했다. 젓가락질의 섬세한 손가락 운동에 비하면 칫솔은 손으로 움켜쥐고 팔을 쓰는 거니까 별것 아닐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복병은 섬세함이 아니라 근육에 있었다. 섬세한 동작이 쓸모없는 건 아니지만 의외로 팔이 아픈 게 먼저 다가온다. 그리 신경 써서 할 만한 동작도 아닌데 이 역시 평생 안 하던 움직임을 갑자기 강요받은 팔이 힘들어한다. 반세기 이상을 한쪽 팔로만 칫솔질하느라 나도 모르게 오른쪽만 혹사한 셈이다.
 
막연히 금세 될 것으로 여겼으나 이게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칫솔을 아래위로 문지르거나 옆으로만 문지르는 단순한 동작이라면 또 모를까, 치과에 가면 자주 듣는 '올바른 칫솔질'을 조금이라도 실천하려면 온갖 근육이 다 어색하고 통증마저 살살 전해온다. 수십 년을 생각 없이 너무 많이 쓴 오른쪽 팔에 미안해질 지경이다.
 
3. 왼발 브레이크
 
1988년에 운전을 시작했으니 직장 생활만큼이나 운전도 오래 했다. 처음엔 다니던 회사 차를 가끔 몰았고, 2년 뒤 작은 차를 사면서부터 마이카족이 되었다. 그땐 차들이 거의 모두 수동 변속기(Transmission)여서 오른발은 가속(Accelaration) 페달과 브레이크, 왼발은 클러치를 밟느라 바빴다. 1990년대 중반 자동 변속기인 차로 바꾸면서 비로소 왼발의 해방을 맞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그 시절엔 선택 사양이었던 에어컨을 갖추지 못한 차는 한여름 찜통더위 속에선 창을 다 열고 다녀야 했다. 심지어 운전석 쪽에 설치한 작은 선풍기를 틀고 다니는 택시도 있었다! 요즘의 젊은 세대가 그걸 본다면 그냥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사진 찍어 SNS에 올리기 바쁠 만큼 기이한 일일 것이다.
 
자동 변속기를 갖춘 차로 바꾸면서 왼발의 자유가 생긴 지 25년이 넘었다. 바꿔 말하면 그 긴 세월 지구 몇 바퀴를 운전하는 동안 왼발은 놀기만 했고, 불쌍한 오른발만 가속 페달과 브레이크 페달을 번갈아 밟는 노동을 했다는 얘기다.
 
1~2년 전부터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차도 연식이 오래되면 잔고장이 생기듯 사람도 나이가 들면 몸이 여기저기가 안 좋아진다는 건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한창때를 기준으로 삼기 마련이라, 머리로는 육신의 퇴행을 인정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어쩔 수 없는 서운함을 느끼기도 한다.
 
가까운 대학병원 정형외과에 들러 EBS TV <명의>에도 나온 저명한 의사와 젊은 레지던트 앞에서 진찰을 받았다. 그런데 비명을 지를 만큼 아픈 것도 아니고 눈에 띄는 부상도 아닌 '오른쪽 다리에 늘 기분 나쁜 느낌과 아래로 전달되는 듯한 간헐적 통증이 있다'라는 꾀병스러운(?) 하소연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하지만 잊을 만하면 스멀스멀 나오는, 잠잘 때도 쿡쿡 지끈지끈하는 불쾌함을 겪으면서는 별생각을 다 하게 되었다.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한쪽 다리만 혹사한 게 원인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30여 년을 오른발로만 반복해 누르는 동작을 했으니 근육에건 뼈에건 스트레스가 누적되었을 것이다. 더구나 고속도로 주행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시내 운전이 많았으니, 오른쪽 다리의 지속적인 압력과 긴장이 전부는 아니어도 일말의 원인은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놀고 있던 왼발을 쓰기로 했다. 어차피 클러치가 사라진 차에서 왼발은 아무 일도 안 하는데 오른발로만 페달 두 개 모두를 밟는 건 불공평하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며 살펴보니 얄궂게도 브레이크 페달이 거의 가운데 쪽으로 치우쳐 있다. 요즘 차가 다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왼발 쓰기를 은근히 조장하는 듯한 애매한 위치에 브레이크 페달이 있는 거다. 나처럼 왼발을 쓰겠다는 사람이 가질 법한, 좋게 말해서 튜닝이라 부르는 개조의 동기가 생기지 않게 했으니 어쨌든 고마운 일 아닌가.
 
위험하지 않은 장소에서 왼발 브레이크를 시도했다.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동작은 찬찬히 다시 보면 새롭고 신기하기까지 하다. 왼발을 눌러 차를 세우는 순간 그동안 얼마나 오른발을 부드럽게 써 왔는지 새삼 깨달았다. 같은 인간의 발인데도 왼발로 차를 사뿐하게 멈춘다는 게 의외로 쉽지 않았다. 급정지 수준으로 차가 울컥거릴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지만 그런 일은 제대로, 그것도 확실하게 일어났다. 그래도 조금씩 빈도를 늘려 왼발 브레이크에 적응해간 결과 이젠 100% 양쪽 발을 쓰며 문제없이 운전하게 되었다.
 
게다가 요즘의 차엔 스마트 크루즈(제조사마다 Smart Cruise Control, 또는 Auto Cruise Control, 또는 Adaptive Cruise Control 등으로 다양하게 이름을 붙였다) 기능이 있어 자동차 전용도로에 올라서면 발을 쓰는 구간이 5% 정도나 될까 싶다. 자동차의 기계적 성능은 더 발전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완성된 단계지만 전자적 편의성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국면으로 보인다. 여러 차를 경험하면서 가장 큰 기술의 발전은 수동에서 자동으로 바뀐 변속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마트 크루즈야말로 이전의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눈부신 혁신이 아닐까. 
 
차를 바꾸고 약 2년 남짓 동안 서해안엔 수시로, 동해안엔 시도 때도 없이, 남해안까지는 종종 다녔다. 왼발이 브레이크를 온전히 맡고 나서 절반의 일이 없어진 오른발은 브레이크 페달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얻었고, 이제 오른발엔 가속 페달을 밟는 역할만 남아 있다. 게다가 스마트 크루즈를 사용하면서 손가락 조작으로도 오른발을 대신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미 브레이크로부터 완전히 떠난 오른발은 더 많은 자유를 얻게 되었다. 최근에는 (심야시간대의 한적한 길이긴 했지만)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끝에서 끝까지 달리면서 발을 쓴 게 고작 열몇 번도 안 된 일도 있었다!
 
신호등마다 서야 하는 시내 운전에서 오토 홀드(Auto Hold)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예전처럼 주행(D)모드에서 차를 정지 상태로 유지하느라 오른발로 브레이크 페달을 계속 누르고 있는 일은 이제 생각조차 하기 싫다. 아픈 다리를 쉬게 하려고 신호에 걸릴 때마다 기어봉(Gear Knob)을 움직여 주차(P)모드와 주행모드로 오락가락하는 번거로움에서도 해방되었다. 오토 홀드 기능이 없었던 이전의 차들을 회상할 때마다 요즘의 이런 편리함이 도드라지게 고맙다.
 
자동 변속기 이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두 다리의 사용에 균형을 찾았다. 자동 변속기는 왼발을, 스마트 크루즈와 오토 홀드는 오른발을 해방한 거다. 이렇게 현시대의 기술이 우리에게 선사한 편리함으로 나의 오른쪽 다리가 불쾌한 통증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으니 어찌 위대한 과학과 공학의 힘에 찬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세상을 만들어 준 훌륭한 과학자와 공학자들, 그리고 기술자들에게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보낸다.
 
좀 다른 얘기지만, 의학적인 근거는 알 수 없으나 어느 글에서 사람이 평생 한쪽을 주로 사용하면 점차 몸 전체의 비대칭이 누적되고 어딘가 틀어져 결국 근골격계 질환이 생기기 쉽다는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 그런 이유로 의도적으로 반대쪽을 쓰는 습관을 들이라는 내용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쇠로 만든 기계도 쓰는 쪽과 안 쓰는 쪽의 내구성에 차이가 나는데, 하물며 훨씬 물렁한 인간의 몸이 한쪽만 쓰는데도 내내 멀쩡하다면 그게 더 말이 안 되지 않나.
 
당장 오늘부터 뒤로 걸어야 할 것도 아니고 물구나무선 채 밥을 먹으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좌우를 바꿔보는 시도이니 처음에 좀 불편한 시기만 지나면 그런대로 할 만하다. 그러니까 일부러라도 왼손으로 문을 열고, 왼손으로 생수병을 돌려 따고, 길을 걷다 돌멩이를 차더라도 왼발로 해보는 게 작지만 의미 있는 일이 되겠다. 그러면서 차차 어려운 동작으로 넘어가면 지속 가능한 습관으로 안착될 것이다. 사실 배드민턴도 왼손으로 해 보면 또 금세 적응하지 않던가. 이렇게 반대편을 써 보면 어딘가가 뻐근한데, 달리 보면 몸의 한쪽이 그만큼 더 혹사당했거나 더 놀았다는 거고, 그래서 그만큼의 비대칭과 불균형이 누적되었다는 방증(傍證)일 것이다.
 
이쯤에서 긴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뭔가를 바꾸는 일은 처음에 조금 힘들고 어색하다. 적응하려는 의지와 꾸준한 연습이 이어진다면 노력 대비 효과는 만족할 만큼 생길 것이라고 본다. 현대 물리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스티븐 호킹의 한 마디가 있다. 전후 맥락은 모르겠으나, 이 문장만을 놓고 보면 우리가 간구(懇求)하는 지성이라는 것도 별 게 아니라는 느낌이 (건방지게도) 막 든다. 훌륭한 사람이 말한 것 치고는 왠지 쉬워 보이니까 까짓것 한번 해볼 일이다. 얼결에 몸이 건강해진다면, 그건 덤이다.
 
“지성이란 변화에 적응하는 능력이다.” - 스티븐 호킹
“Intelligence is the ability to adapt to change.” - Stephen Haw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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