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씨반(散氏盤) 전임
예기비 전임에 이어 이번엔 금문(金文)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산씨반 전임.
用夨[戈菐]散邑,廼即散用田。眉:自瀗涉,以南至于大沽,一封;以陟,二封;至于邊,柳。復涉瀗,陟雩[虘又]■■[阜美],以西,封于播城,楮木;封于芻逨,封于芻道;内陟芻,登于厂湶,封[者刀],[木厈]。[阜美]陵崗,[木厈]。封于原道,封于周道;以東封于■東疆;右還,封于眉道;以南,封于 ■ 逨道;以西,至于[工隹]莫。眉井邑田:自桹木道左至于井邑封道,以東一封;還,以西一封;陟崗,三封;降,以南,封于同道;陟州崗,登,[木厈];降,棫;二封。
夨人有司眉田:鮮且、微、武父、西宮襄、豆人虞考、彔、貞、師氏右眚、小門人繇、原人虞艿、淮司工虎、■龠、豐父、[工隹]人有司刑、考,凡十又五夫。正眉夨舍散田:司徒逆、司馬單堒、邦人司工[馬京]君、宰德父;散人小子眉田:戎、微父、效■父、襄之有司橐、州■、修從■,凡散有司十夫。
隹王九月,辰才乙卯,夨俾鮮且、■旅誓曰:“我既付散氏田器,有爽,實余有散氏心賊,則爰千罰千,傳棄之。”鮮且、■旅則誓。廼俾西宮襄、武父誓曰:“我既付散氏濕田■田,余有爽變,爰千罰千。”西宮襄、武父則誓。氒受圖夨王于豆新宮東廷。氒左執要史正中農。
퍼온 글:
산씨반은 서주의 만왕시대(서기원 9세기)에 제작한 동반으로 주기 중에 대표적인 작품이며 명문은 안쪽 바닥에 수출되어 19행, 행19자 모두 357자로 되어 있으며 청나라 강희 연간에 세상에 알려졌으나 언제 어디서 출토되었는지는 알 수 없고 희경14년(1809)에 양강 총독이 인종의 50세 생일에 진상하여 궁중에 보관되었으며 국민당정부가 대만으로 옮겨가 현재는 대만의 고궁 박물원에 소장되어있다. 명문은 사돈 관계에 있는 실씨와 산씨 두 가문이 토지를 분배하여 경계를 정하고 증인을 세워 서로 침범하지 않기를 확약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산씨반은 서주의 토지제도와 계약 제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산씨반은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후 지금까지 서예가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금문으로 수많은 평론과 창작의 대상이 되었다. 선진시대의 서예 작품 가운데 산씨반 만큼 후세 서예가의 사랑을 받은 작품은 석기문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서주 금문 서예의 필 획은 크게 올챙이형, 쥐꼬리형, 덩어리형, 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산씨반은 이 가운데 어디에 속한다고 꼬집어 설명하기도 어렵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서주 금문 필 획의 심미적 특징을 종합적으로 표현하였다. 자연스럽게 써 내려간 필 획은 천진난만하여 규칙이 없는 듯 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규칙과 미감을 표현하였다. 산씨반은 서예의 가장 큰 특징은 세로로는 줄을 맞추었으나 기계적이지 않고 가로로는 줄을 맞추지 않았으나 산만하지 않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시칙과 장법이다. 결자와 결구도 시칙과 마찬가지로 글자 본래의 크기와 형세에 따라 크기와 방향이 정하여져 변화가 풍부하고 자유스럽다. 산씨반은 전체적으로 질박하고 천진하면서도 서주 금문의 고유한 미감인 장엄하고 전아한 명칭을 심미적 특징을 잘 표현하였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자유스러운 운 필과 장법으로 ‘초상’이라는 명칭을 얻었다.
散氏盤(周) 금문(金文)은 금속기물 위에 주조하거나 새긴 문자로 금속전폐(金屬錢幣)의 문자도 이에 포함된다. 또한 종과 정이 대표적이므로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한다. 종은 대부분 악기에 속하고 정은 대부분 예기에 속한다. 이 가운데 일부분의 예기는 종묘에 보존되어 국가와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중기(重器)’라고 한다. 그 내용은 주로 분봉(分封)?상사(賞賜)?조근(朝覲)?제사?정벌?공적 등이다. 그 문자가 오목하게 들어간 것을 ‘관(款)’이라 하고 볼록하게 나온 것을 ‘지(識)’라 하기 때문에 금문을 또한 ‘종정관지(鐘鼎款識)’라고도 한다. 시대와 기구가 다름으로 인하여 금문의 형식과 문자의 많고 적음이 각기 다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초기 금문의 문자는 적으나 장식성과 도안성을 강구했으니, 예를 들면 <사모무방정명(司母戊方鼎銘)>?<낙패부을정(落貝父乙鼎)>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갈수록 문자가 많아지면서 상형도안의 문자는 점차로 소실됐다. 이외에 전폐와 병기의 문자는 일반 청동기 글자체와 또한 같지 않다. <산씨반>은 또한 <시인반(矢人盤)>이라고도 하며 서주시대 여왕(?王) 때의 기명(器銘)이다. 청나라 건륭(乾隆, 1736-1795) 초에 섬서성 봉상(鳳翔)에서 출토되었으며 현재 대만고궁박물원에서 수장하고 있다. 375자를 19행으로 썼으며 금문의 전형적인 면목을 갖추었다. <산씨반>?<모공정(毛公鼎)>?<괵계자백반(?季子白盤)>?<대우정(大盂鼎)>을 ‘사대국보’라 일컫는다.
<산씨반> 시기의 금문 서풍은 대체로 규정적이고 정묘하나 이는 유독 특별한 서풍을 나타내니, 즉 상당히 거칠면서 활발하고 천진스럽다. 용필을 보면 머리와 꼬리는 둥글고 윤택하며, 중간은 포만하면서도 조금 파동을 띠고 있다. 따라서 평화롭고 온건한 가운데 동적인 느낌이 있어 매우 의미가 있다. 보기에는 기가 있고 힘이 없어 뜻을 두지 않은 것 같지만 안으로 부드러운 강인함을 품고 있어 용필에서 가장 어렵다는 일종의 내재된 역량을 나타내고 있다. 이보다 더욱 큰 특징은 결구로 자형은 넓적하고 둥글면서 체세는 기울어져 있다. 각 글자는 마치 몇 개의 조약돌을 마음대로 쌓아서 만든 형체처럼 자연스럽고 활발하며 생기가 물씬거려 공간 분할에서 고른 느낌이 없다. 예를 들면 ‘宮’자는 왼쪽이 성글고 오른쪽이 긴밀하며, ‘嗣’자는 왼쪽이 긴밀하고 오른쪽이 성글며, ‘門’자는 가운데가 성글고 밖이 긴밀하여 서로 향하는 체세를 이루고, ‘德’자는 전체가 모두 긴밀하고, ‘散’자는 오른쪽이 기울어져 내려가는 뜻을 나타내었고, ‘則’자는 왼쪽을 올려 의지하는 뜻을 나타냈다. 좌우는 대부분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아 부앙향배의 형세를 나타냈고, 상하는 정제된 글자가 하나도 없어 동적인 느낌이 강하면서 의태가 족하다. 장법을 보면 글자에 따른 결구의 특징이 때로는 성글고 때로는 조밀하여 남겨진 공간이 같은 곳이 하나도 없다. 성글고 방종한 가운데 영활하고 화목한 공력을 함유했고 고졸한 가운데 노숙한 필치를 얻었다. 흐트러진 것 같으면서 다시 합하고, 합한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흐트러져지며 혼후한 원기를 얻고 형체와 풍격이 높고 예스러우며 행동거지가 천성에서 나왔다. 이를 보면 금문에서 얻기 어려운 신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