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방/실용서예 탐구

세진원-경희대법전원기숙사

볕좋은마당 2011. 11. 4. 10:00

웬만해선 이 일을 시작하지 않으려 했는데, 순전히 이 멋진 글씨 때문이다. 오가며 마주친 간판인데, 보면 볼수록 훌륭한 서예가의 솜씨와 품격이 배어 나오는 수작이다.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건물 외벽을 장식한 아름다운 글씨의 조형미를 느끼며 항상 즐거움 반 부러움 반이었다. 차제에 일상 생활에서 보는 간판/상호 중 배울 점이 있는 훌륭한 것들을 찍어 올리고 감상할 생각이다. (물론 무거운 DSLR 카메라는 늘 갖고 다닐 수 없으니까 iPhone의 화질과 약간의 보정으로 만족해야...)

 

분류하자면 이런 분야를 '실용서예'라고 할 수 있겠다. 흔히 서예가 무슨 정신 수양이니 인격 도야니 하는 거창한 목적을 지향하는 것처럼 얘기들을 하지만 바쁘게 사는 현대인에게는 어쩐지 현실과 유리되었거나 조금 추상적인 수사로 들리기도 한다. 전통서예의 어법(語法)에 맞추어 근사한 작품을 써 본들 서예학원이나 일부 가정의 벽에 걸리면 그나마 호사일 테지만, 그럴 공간이 없는 가정에서라면 구석에 대충 처박혀 버리기 일쑤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 대가의 솜씨가 발휘되어 누군가의 눈이라도 즐겁게 해 주면 오히려 그것이 서예가 더 많은 사람의 정신 건강에 기여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클릭한 하면 컴퓨터에서 반듯한 폰트로 글씨를 찍어주는 시대다. 하지만 악필인 사람도 정확한 글씨를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수많은 영화 포스터, 드라마 제목, 회사 로고, 제품 포장, 길거리 간판 등에서까지 손으로 쓴 '손글씨'가 역설적이게도 대세가 되고 있다. 현대 문명이 발달한 선진국일수록 기계나 도구에 의존한 스포츠보다 인간의 달리기 본성에 충실한, 매우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라톤이 인기를 구가하듯 깔끔하고 빈틈 없는 폰트의 과잉이 오히려 적당히 어설프고 투박해 보이는 손글씨의 유행을 낳은 것이다. 

 

단정한 예서로서, 절(折)이 적절히 들어간 운필에 각(刻)을 하면서는 자연스런 칼 맛까지 더해졌다. (世자 부근 테두리를 칼로 쳐 낸 감각은 낙관인의 분위기!) 게다가 강렬하고 또렷한 느낌을 주는 빨간 배경색.

 

한글은 판본체를 기반으로 한 듯하면서도 작가 고유의 스타일이 가미되었다. 글자 하나 하나는 의도적인 어눌함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잘 조화되어 자연스러운 조형미가 극대화 되었으며, 적당한 방필(方筆)과 묵직한 운필로 진중한 느낌이다. 잘 개발된 서체로서 위의 세진원과 대비되는 연한 파란 채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