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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涯比隣 - 퍼옴

볕좋은마당 2011. 5. 25. 08:08

하찮은 일들로 이맛살이 찌푸려져 나 자신이 자꾸만 작아 보일 때면, 저 일제강점기의 강개(慷慨)한 지식인들을 떠올리곤 한다. 그들은 비록 엄혹한 일제 치하에서 나라 잃은 백성으로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했지만 분명한 시비(是非), 뚜렷한 대의를 내세워 어깨를 펴고 당당히 걸을 수 있었다. 만주로 중국으로 일본으로 동아시아 전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그 당시의 지식인들에 비해 오늘날 지식인들은 분단된 강토에서 활동의 반경은 더 좁아졌고 모습은 왜소해졌다. 또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지식인들의 현란한 말재주, 자기 변명에 이제 더 이상 천하의 의리도 공론(公論)도 없어진 듯하다.

큰 걱정거리가 해소되면 그 바로 아래 걱정거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오늘날 우리는 평안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늘 더 작은 문제에 고민해야 하고 시시콜콜한 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내(海內)의 지기를 생각하며 조선의 역사를 바로잡아 세상에 알리는 큰 일을 논했던 우리 옛 지식인의 얘기를 읽으면서, 우리의 국촉한 가슴을 펴자.


40일 안에 세 차례나 편지를 보내주시니 해내(海內)에 지기(知己)가 있음에 천애(天涯) 먼 이역이 가까운 이웃이라 서로 만난 것이 늦고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한스럽지 않았습니다.


사서(史書)를 간행하는 일은 조만간 착수할 수 있다고 하시니, 축하드립니다. 이조사(李朝史)를 편찬하는 일은 착수한 게 있는지요? 이 책도 이어 간행한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다만 자금이 부족할까 염려될 뿐입니다. 또 한편 이 책이 한 번 유포되면 곧 시비(是非)의 숲 속에 들어가게 될 터이니, 세상에 내는 것을 신중히 생각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당론(黨論)은 앞 편지에서 말씀하신 것이 모두 저같이 울타리 속에 갇힌 자가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한두 가지 사안인 경신(庚申), 기사(己巳), 갑술환국(甲戌換局)에 대해서는 아직 후련히 깨우쳐주지 않으니, 어쩌면 그 흑백이 절로 분명하여 말할 게 못 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제가 남인(南人)이어서 말씀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시비(是非)는 천하의 공물(公物)이요, 사람들은 본래 바른 도리로 살아왔던 것이니, 어찌 한 사람, 한 때의 사사로움 때문에 숨기고 회피하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보낸 시에 아직도 화답해 주지 않으시니, 어쩌면 초당선생(草堂先生)께서 근자에 삼협(三峽)의 꽃과 새들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인지요?

[四旬內三辱下敎, 海內知己, 天涯比隣, 不恨相得之晩相去之遠也. 史刊, 承就緖有期, 可爲奉賀. 李朝史業有所定著否? 如得嗣刊, 何幸如之! 但恐是無麵不托, 又慮此書一布, 便入是非林中, 其出不可不審耳. 黨論, 前幅所示, 皆非局於藩籬者所及. 惟是一二大案, 如庚申獄己巳甲戌換局, 未蒙提破, 豈以其黑白自分, 有不足說者耶? 抑以兢爲南黨而難言之耶? 是非, 天下之公; 斯民, 直道而行, 豈一人一時之私而有所諱避於其間哉! 拙詩, 尙靳俯和, 豈草堂先生近欲寬三峽之花鳥耶?]


-  조긍섭(曺兢燮), 〈김창강에게 보내다[與金滄江]〉, 《암서집(巖棲集)》

 

〈해설〉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1873~1933)이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 1850~1927)에게 보낸 편지이다.

‘해내(海內)에 지기(知己)가 있음에 천애(天涯) 먼 이역이 가까운 이웃이라’는 것은 당(唐)나라 시인 왕발(王勃)의 〈촉주로 부임하는 두소부를 보내며[杜少府之任蜀州]〉에서 “해내에 지기가 있음에 천애 먼 곳이 이웃만 같아라.[海内存知己 天涯若比隣]”란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 즉 아무리 먼 곳이라도 마음이 통하는 벗이 있으면 거리가 멀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비(是非)의 숲 속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조선의 당쟁사(黨爭史)를 서술해 놓으면 이를 읽어보고 각 당색(黨色)의 사람들이 저마다 옳고 그름을 따지게 될 것이란 뜻이다. ‘울타리 속에 갇힌 자’란 심재 자신이 남인(南人)에 속하므로 당색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창강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당쟁사인 《당의통략(黨議通略)》을 저술한 친구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과 같이 당색에 속하지 않았다. 그래서 심재는 창강에게 자신이 남인이라 해서 숨기고 말하지 않을 필요가 없다고 한 것이다.


‘초당선생(草堂先生)’은 본래 당(唐)나라 안사(安史)의 난리 때 피난하여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 가 초당에서 살았던 두보(杜甫)를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창강을 가리킨다. ‘삼협(三峽)의 꽃과 새들의 마음을 풀어주고자 한다’는 것은 당(唐)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강가에서 바다처럼 불어난 물을 만나 애오라지 짧은 시를 읊다.[江上値水如海勢聊短述]>의 “늙어 감에 시편들이 모두 부질없는 흥이니 봄이 옴에 꽃과 새들은 깊이 시름치 말거라.[老去詩篇渾漫興 春來花鳥莫深愁]”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두보의 이 구절은, 늙어가면서는 애써 고심하여 시를 짓지 않으니 꽃과 새들은 자기들을 보며 핍진하게 묘사할까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심재는 자기가 보낸 시에 화답해주지 않은 창강에게 “이제 노경에 이르러 시흥(詩興)이 부쩍 줄어든 것은 아닌지요?”라고 말하여, 자기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왜 화답해주지 않는지 궁금하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창강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가족을 데리고 중국 상해로 망명, 통주서국(通州書局)의 교서(校書)를 맡아 보면서 조선의 역사를 바로세우는 저술들을 간행하였다. 이 편지는 1915년에 보낸 것으로, 심재와 창강이 서로 안 지 오래지 않았을 때이다. 여기에서 사서(史書)는 창강이 하겸진(河謙鎭), 왕성순(王性淳), 하익진(河益鎭), 황원(黃瑗), 이형(李炯) 등 국내외의 학자들과 함께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교정 간행한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이고, 《이조사(李朝史)》는 조선통사(朝鮮通史)격인 《한사계(漢史綮)》를 가리킨다.


이 편지를 보낼 당시 심재는 43세이고 창강은 66세였다. 심재가 23세나 어렸고 창강은 먼 이역 땅에 망명해 살고 있었는데도 당대의 문장가였던 두 사람은 해내의 지기로서 오랫동안 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문학, 역사, 철학 등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깊이 있는 담론을 펼쳤다. 서해 바다를 사이에 두고 왕래한 이들의 편지는 격조 높고 진지한 담론으로 채워져 있다.


사람들은 대개 인류사회가 줄곧 발전하고 진화해왔다고만 생각한다. 그렇지만 발전의 이면에는 분명 퇴보도 있는 법이다. 나무를 보면 숲은 못 본다는 격언이 있거니와 세세한 일들에 정신이 팔리면 본래의 자기를 잃기 쉽다. 오늘날 세상은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학자도 책상머리만 지키고 앉아 자기 전공 분야만 파고 있어서는 세상 돌아가는 판세를 읽지 못해 얘기 한 자리에도 끼기 어렵다. 복잡하고 시시콜콜한, 알아야 할 것들은 생활 곳곳에 또 얼마나 많은가. 자고 일어나면 새로 알아야 할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 지식인의 가슴이 자꾸만 움츠러들어 작아지지 않을 수 없다.


아! 저 고인(古人)들은 비록 곤궁했을지언정 대의와 목표가 뚜렷이 내걸려 있어 자잘하고 구차한 것들을 물리쳐 버릴 수 있는 명분이 있었으니, 몸을 웅크린 채 주위를 살피며 살아가야 하는 오늘날 지식인들에 비해 차라리 행복했지 않은가.


ㆍ참고사항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2007)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