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나는 아이디어
배나 비행기를 타지 않으면 바로 옆 나라도 갈 수 없는 우리는 반도가 아닌 섬나라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다.
언젠가는 우리도 육로로 국경을 넘어 어디든 갈 수 있기를 고대한다. 경기도에서 강원도로 넘어가듯 차를 몰고 다른 나라를 여행하는 유럽인들은 우리는 가늠조차 힘든 편리함과 즐거움을 만끽한다. 우리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유럽처럼 차를 운전해 다른 나라에 가거나, 드물지만 배로 가는 걸 제외하면 대부분 공항을 통해 외국에 첫발을 디딘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 대한 첫인상은 공항에서 정해지기 마련이다. 국가 이미지를 제고하겠다고 대규모 행사나 비싼 광고판에 돈을 쓰는 정부라면 자국의 첫인상이 공항에서 좌지우지되는 걸 원치 않겠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인천 공항에 내려 전철이나 공항버스를 타면 서울에 들어오기 쉽다. 그런데 그게 어려운 외국인이라면 결국 택시를 탄다. 어느 나라가 되었든 택시는 초행길의 외국인이 타국에서 처음 만나는 운송 수단이 되기 십상이다. 예전엔 공항에서 택시를 탄 외국인이 악덕 기사에게 바가지를 썼다는 뉴스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정부에서는 단속을 하느니, 우리나라의 이미지가 어떻니 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지키는 열 사람이 도둑 하나를 못 당한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어리바리한 손님과 약삭빠른 주인 사이에서 승자는 항상 결정되어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그런 걱정을 할 수준을 한참 넘었지만 우리의 과거 모습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나라도 있다. 대놓고는 아니지만 교묘하게, 그것도 항의하지 못할 만큼만, 능글맞게, 스리슬쩍 여행자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가 꽤 있었다. 예를 들면, 카드 결제 기기에서 카드마다 에러가 나는 걸 보여주고는 현찰을 요구하는 기사도 있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미터는 착실하게, 따박따박 올라갔다. 현찰 결제는 자국 통화 말고 유로로 한다면서 환전 비율을 은근슬쩍 높여 계산했다.
카드 여러 개가 다 안 될 리는 없는데, 느낌이 안 좋아도 실랑이하기 싫어 요구대로 현찰을 세어 주었다. '관광지가 그렇지 뭐, 따지기 귀찮아!'하며 눈 감아주기 일쑤였다. '짜식, 애쓴다! 그래, 내가 너보다 선진국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쿨하게 봐주지.' 류의 국뽕(!)도 나의 관대함에 한몫 거들었고, 그 바람에 지출이 늘었… ㅜ.ㅜ
한 나라의 관문에서 이런 시비가 생기면 '여긴 후진 나라'라는 느낌이 안 들 수가 없다. 전문 용어로 '눈탱이'도 한두 번이다. 관광객을 등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는 게 일상인 동네라면 제 조상들이 아무리 위대했던들 후손들의 나라는 바로 후진국이 되어 버리는 거다. 별 것 아닌 택시 요금 때문에 방문국에 대한 첫인상이 추락하면, 막대한 홍보 예산을 엉뚱한 곳에 쓰는 정부는 결국 애먼 짓을 하는 게 아닐까.
그러다 '반전'을 만났다.
체코 프라하 공항에 내렸다. 택시비를 아끼려면 대중교통을 알아봐야 하니 폰으로 검색을 하거나 앱을 깔거나 뭔가를 해야 한다. 하지만 무릉도원에 간들 귀찮은 일이 안 귀찮아지랴. 바로 전에 머물던 나라와는 또 다른 대중교통 시스템을 들여다 보는 것도 스트레스다. 괜한 피로를 얹어 가는 것보다 돈을 조금 쓰는 게 낫겠다는,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결국 택시를 타기로 했다. 여느 공항과 마찬가지로 밖에선 택시들이 늘어서 있었다. 맨 앞의 택시를 타려는 순간 제복(까진 아니지만 한눈에 봐도 공공 기관원) 같은 옷을 입은 여자가 태블릿을 들고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택시를 탄다는 대답을 듣고는 목적지인 호텔 이름을 물었고, 민첩한 손놀림으로 태블릿을 다루더니 우리에게 상점 영수증 같은 종이를 건네주었다.
'Hotel OOO, €28~€32'
'뭐, 이런 걸 주지?' 하다가 '아~!' 하고 알았다. 우리가 가는 호텔 상호와 함께 대략의 택시 요금이 떡하니 인쇄된 것이었다. 그때의 느낌을 표현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프랑스어에서 온 '부왈라!(Voilá)'라고 하기엔 약하고, '우와~!' 까진 아니지만 '야아~'나 '헐~' 정도는 괜찮겠다. 좀 더 일상적인 말로는 '꼼짝 마라!'가 생각났다.
그는 내게 준 것과 비슷한 종이 조각을 택시 기사에게도 건네며 호텔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줬다. 이거야말로 진정한 '꼼짝 마라!'가 아닌가. 눈탱이의 싹을 확실하게 잘라버린 거다. 처음엔 '뭐지?' 했던 우리의 표정이 도로를 달리며 감탄과 안도로 바뀌어갔다. 햐~, 이런 방법이 있었네! 당연하게도 우리는 정확한 위치에 도착하여 정확한 요금을 냈다. 그것도 기분 좋게.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시스템도 아니다. 공무원은 아닌 것도 같고, 공항에서 고용한 직원일 수도 있다. 여러 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단 한 사람의 단순한 업무가 수많은 여행자에게 편리와 안도를 선사하고 있던 거다. 그가 아니었다면, 다른 나라의 공항이었다면, 매 순간 마주했을 의심과 불안이었다. 상황에 맞는 발상과 성실한 직원 한 명으로도, 게다가 이렇게 쉽게, 소위 '국격 상승'이 가능하다는 걸 목도했다.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큰 상을 받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혹시 받았나?) 비근한 예로, 10여 년 전부터 우리나라 도로의 나들목, 진출/진입로에 생기기 시작한 노면 색깔 유도선은 이젠 서울 시내에서도 익숙한 시설이 되었다. 한국도로공사 직원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는데, 도로공사에서 일하는 자신도 운전 중 헷갈린 적이 있어서 궁리해 내었다고 한다. 이렇듯 한 사람의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안전과 편리를 선사할 수도 있다.(그분은 무슨 경진대회 출품으로 상금 10만 원을 받아 직원 회식에 썼다고 한다. 막대한 효과에 비하면 짜고도 짠 보상... 공무원 처우란...)
프라하 공항의 경우엔 단 한 사람의 임금으로도 엄청난 예산에 필적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비행기에서 막 내려 수하물 찾고 수속 거치고 이제야 나온 사람은 그러잖아도 피곤하다. 이런 여행자가 공항 주변의 'Welcome to 어쩌구...'하는 광고판에서 받는 호감이 '눈탱이' 없는 택시를 탄 안도감에 비할 수 있을까?
그래서... 프라하는 멋진 곳이다.
(이것 말고 다른 것도 멋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