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So한.../타인의 일상

# 무사 귀국

볕좋은마당 2023. 7. 29. 11:48

어느 게시판을 읽다 눈길이 머문 문장이 있었다, 곱씹을수록 고개를 끄덕이게 했던.

'여행이란 타인의 일상을 나의 비일상으로 관통하는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내 집이 최고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는 수준 낮은 표현을 지껄여온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 작은 사건이었다. 이제야 제법 멋진 말을 만나다니, 이미 회복 불능 상태로 추락한 나의 이미지는 어쩔...
 
구차하게 변명하자면, 이런 개똥철학이 몸에 밴 건 직업상의 경험 때문이다. 한때 수업 중 자투리 시간에 영어 속담을 다루기도 했다. 속담이란 오랜 세월 같은 공동체에서 응축된 지혜여서 짧은 글도 그들의 생각을 엿보는 즐거움을 주었다. 내친김에 우리나라 속담과 같거나 다른 것들을 찾아 짝지어보기도 했는데, 그 재미가 쏠쏠했다. 언중(言衆)의 문화를 이해해야 그 언어에 대한 학습 효과가 크다는 건 누구나 안다. 하지만 말이 쉽지 매시간 진도 맞추기 바쁜 와중에 속담까지 다루는 건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의도가 좋다고 상황까지 따라주는 건 아니니까.
 
그럼에도 영어 속담에 대해 얘기하며 선생이나 학생 모두가 즐거웠던 까닭은 칙칙한 교과서로부터 벗어난 해방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교과서로부터의 해방이건 일상에서의 탈출이건 역시나 인간은 비슷한 일의 반복을 싫어하는 존재다. 여행의 즐거움과 설렘에는 바로 그런 '이탈'도 한몫하는 게 아닐까. 
 
여하튼 그때 다룬 속담 중 'Be it ever so humble, there is no place like home.'이 있었다. '아무리 누추해도 집 만한 곳이 없다', 즉 '집이 최고다'라는 말이니 이 얼마나 내가 주장하는 여행의 목적에 딱 맞는 속담이란 말인가! 제아무리 좋다는 여행지에 가서 맛집을 찾아 배불리 먹고 왔어도 내 집에 들어서는 순간의 안도와 푸근함은 나만의 느낌이 아닐 것으로 굳게 믿었다. 그래서 주변 사람이 여행을 다녀왔다 하면 항상 나의 '좌우명'을 시전했던 거다. 속으로는 '거 봐, 내 말이 맞지 않아?'라며 좁쌀 같은 으쓱함을 감추기도 했다.
 
6월 하순이 되어 유럽에 가게 되었다. 의외로(!) 바쁜 백수라 이런저런 사정으로 기회를 몇 번 미룬 끝에 더 더워지기 전에 다녀오자고 했다.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 인생에서 패키지란 아직 없었고, 이번에도 무계획, 막무가내, 시행착오, 좌충우돌, 두서없이, 그냥저냥... 대충 떠나긴 했다. 그리고 '타인의 일상을 나의 비일상으로 관통'하는 일에 나섰다.
 
무사히, 다친 곳 없이, in one piece로 - 이건 상징적이긴 한데, 상상하면 으으... 좀 섬뜩한 표현이다 -  돌아왔다. 6월 21일에 가서 유럽을 흘러 다니다 37일 만에 집에 온 거다. 누구에겐 '지겨웠다'고 카톡을 했다가 외국에서 한 달 살기가 로망인데 무슨 소리냐는 타박을 듣기도 했다.
 
하긴 누군가의 로망을 초과 달성한 건 맞다. 그런데 그게 의도치 않았다는 건 함정. 6월 들어 별생각 없이 출국 비행기표만 덜컥 예약했는데, 휴가철이 겹쳐선지 돌아오는 비행기표가 없는 거다. 별수 있나, 항공사 일정에 맞출 수밖에. 그래서 졸지에 5주도 넘게 타국을 전전했다. 돌아와 세어보니 비행기 6회, 렌터카 3일, 택시는 부지기수, 기차 수회에 호텔 16곳을 거쳤다! 이게 '전전'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호텔 조식을 좋아라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5주는 좀 아니다. 카투사로 군 복무할 때 이런 거 매일 먹으며 제대할 때까지 견뎠다는 말을 귓등으로 흘리던 아내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남편의 '트라우마'에 공감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간 게 소바~악하지만 성과라면 성과다. (이제서야 내가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 2위가 샌드위치라는 말을 이해해 주다니!)
 
별 계획 없이 갔으니 돌아온 뒤 뭔가를 글로 남기겠다는 생각은 '1도' 없었다. 그런데 시차에 적응하면서는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소비한 일을 이대로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기엔 아깝다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거창한 여행기를 쓸 능력도, 핵심 정보니 꿀팁이니 하며 드러낼 만한 것도 없다. 인터넷과 유튜브에 온갖 사진과 영상이 넘치는 마당에 나까지 무슨 정보를 주겠다고 나설 이유는 없다. 다만, 스쳐갔지만 기억하고 싶었던 장면이나 별것 아니었어도 나에겐 인상 깊었던 일 따위는 이 방에 차차 끄적거려 남길 생각을 했다.
 
여행 관련 파워블로거들이야 사진이며 정보며 작심하고 모아서 잘도 쓰던데, 그럴 기획력과 처지가 안 되니 결국 끄적거림으로 시작해서 대충 마무리할 것 같다. 대부분 단상(斷想)에 머물다 마침내 졸렬한 글이 되겠지만 그러면 어떠랴, 비망록에 불과한 몇몇 문장이면 이 블로그의 수준에 딱 맞는 것이리라... 하며 용기를 내 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