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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글: 2015년 7월 9일 (목) <데일리 전북> 기사

볕좋은마당 2020. 10. 29. 21:23

[수필선] 묵향에 담긴 삶의 지혜와 멋, 전주한옥마을에서 - 박용근 기자

 

호남고속도로 전주 톨게이트 입구에 ‘전주’라고 쓰인 현판글씨가 눈에 띈다. 넉넉하고 푸짐한 글씨인데, 들어갈 때 글씨와 나올 때 글씨가 다르다.

 

입구의 글씨는 자음이 작고 모음이 크며, 반대로 출구의 글씨는 자음이 크고 모음이 작다. ‘자음은 아들을, 모음은 어머니를 뜻한다.

 

고향으로 들어 올 때는 어머니의 큰 사랑과 따뜻한 정을, 나갈 때는 자식들이 크게 되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것이 곧, 전주의 표정이요 마음이다. 이렇게 서예는 표현하는 기법에 따라 숨어있는 뜻이 다르다.

 

전주 톨게이이트에서 5분여쯤 들어오면 강암 선생이 휘호한 ‘湖南第一門’ 이라는 현판이 제일 먼저 반겨준다.

전주한옥마을에 도착하여 천천히 걷노라면 글씨의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최명희 문학관의 ‘獨樂齋’, 가람 이병기가 시조를 짓던 ‘養士齋’, 판소리 공연장으로 지어진 ‘學忍堂’, 전주동헌의 ‘豊樂軒’ 전주예절원인 ‘三樂軒’, 강암 송성용의 ‘我石齋’ 등의 현판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현판들의 글씨는 효산 이광렬, 산민 이용, 심석 김병기, 효봉 여태명, 무산 이승철, 중하 김두경, 이당 송현숙, 취석 송하진, 미산 송하선 등 전주에 살고 있으며 전국을 대표하는 서예가들의 필획筆劃들이다.

 

또한 한벽당에 오르면 강암 송성용의 글씨가, 오목대에 오르면 석전 황욱의 글씨가, 옥류동 바위에 새겨진 창암 이삼만 글씨가 뭉클하게 다가온다.

 

유난히 우리고장엔 서예가들이 많다. 그래서 그런지 전라북도에서 개최되는 서예대회가 셀 수 없이 많다. 서예書藝의 글자에서 말해주듯, 먼저 글을 배우고 익혀 붓으로 예술적 감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글씨의 뜻과 한 획 한 획을 긋는 붓의 질감에 따라서 담겨지는 뜻이 달라진다. 나도 퇴직을 한 뒤 붓을 잡기 시작한지 5년째지만, 예술적인 감각은커녕 아직도 붓이 제 멋대로 춤을 춘다.

 

서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즘 전서篆書에 예속되어 나온 서체라는 예서隸書를 배우면서 그 깊이를 새겨가고 있다.

 

먼저 가로획의 파세波勢를 할 때 인생의 살아가는 과정을 생각하며 획을 그어간다. 출생에서부터 성장, 장년, 노년, 승천을 생각하며. 시작부분은 누에의 머리 모양으로 하며 두어 번 붓을 바로잡아가다가 끝부분에서는 기러기 꼬리처럼 뾰족하게 하는 필법이다.

 

획을 그을 때 직선으로 긋지 않고 자연스러워야 하며 끝이 잘 빠져야하는데 이 부분만 오면 덜덜 떨리는 것은 아직도 필력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다음으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내려 긋는 파임에는 평날平捺과 사날斜捺이 있는데, 이 또한 글씨를 쓸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다. 비스듬히 내려 긋다가 파임을 할 때 붓의 방향을 바꿔 꺾는 필법인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붓에 머금은 먹물이 붓을 멈추고 있을 때 가만히 있지 않고 번지기 일쑤다. 그렇다고 빨리 붓을 놀리면 하얀 공간이 생기는 갈필渴筆이 나오고.

 

이뿐인가. 내려 긋다가 왼쪽으로 꺾는 도법挑法, 가로획을 긋다가 세로획을 긋는 구획鉤劃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서예는 모양이 아니라 동작이 중요하므로 ‘붓 운전’, 곧 ‘運筆’에 있음을 알고 있지만 내 맘대로 될 날이 언제일까.

 

전서가 굴리는 획이 중심이라면 예서는 꺾는 절획折劃에 있기 때문에 운필의 동선動線이 곡선이동에서 직선이동으로 바뀌는 게 다른 점이다. 가로는 길게, 세로는 짧게 쓰는 글씨의 안정감과 절필이 예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전북이 낳은 수많은 서예대가들. 평생을 붓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기에 후대의 우리가 존경하지 않는가. 허기진 배를 움켜쥐면서도 지필묵紙筆墨만큼은 곁에 두었던 그분들의 고귀한 삶이 각기 다른 한옥마을의 현판에서 읽혀진다.

 

글씨 속에 깃들인 내용과 서체를 생각하며 감상하는 것이야말로 관람의 기본이다. 길거리 판매대에서 파는 먹을거리를 사서 군것질이나 하면서 친구들과 노닥거리기만 하고 볼 것도 별로 없다고 투정을 부려서야 되겠는가.

 

한옥마을에는 ‘아석재’가 있다. 이곳은 강암 송성용의 친구들이 마련해 준 집이다. 별반 특이해 보이지 않는 한옥일 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콘텐츠가 다양하다.

 

추사 김정희 선생을 비롯한 당대의 대가가 휘호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집안 곳곳에는 평생 상투와 한복을 입고 고집스럽게 전통을 고수하고 산 강암의 지조志操가 어려 있다.

 

강암 말기에 지은 강암 서예관은 서예갤러리로서 묵향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반겨주고 있으며, 해마다 강암 서예대전이 열려, 올해 16회를 치러 전국의 서예가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전주에는 크고 작은 각종 서예대회가 열리고 있어 연중 전시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주소리문화의 전당, 전북예술회관과 같은 큰 공간에서부터 한옥마을의 작은 공간에 이르기까지 수시로 열리고 있다.

 

전주를 제외한 각 시군에서도 정읍사문화제나 남원춘향제 행사 등에서 해마다 전국대회를 개최하여 서예인들의 저변을 확대하고 있다.

 

나도 도내의 전라북도서예전람회와 신춘휘호대전, 그리고 전국노인서예대전에 출품하여 입상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두 달 전부터 문인화까지 입문했으니 더욱 어깨가 무겁다.

 

서체에 담겨진 삶의 지혜를 터득하고, 서체에서 풍기는 멋에서 아름다움을 읽을 줄 아는 삶이야말로 행복이지 싶다. 한 자字의 글자를 알기 위해 옥편을 찾아야 하고, 한 획을 익히기 위해 수십 번 쓰기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삶을 가꿔갈 것이다.

 

전주를 찾는 이들이여! 삶의 지혜와 멋을 묵향이 그윽한 전주에서 찾아보시면 어떨까?

 

(2015. 7.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