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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고마움

볕좋은마당 2018. 7. 20. 20:57

 

나 스스로 그럴 능력과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선생이라고 주변 사람들이 이런저런 자녀 문제를 토로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한다. 백 명에겐 백 가지의 삶이 있고 그것의 몇 곱절이 넘는 생각과 주장이 있을 테니, 정답이랍시고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는 건 사실상 없다. 지구상의 수십억이 넘는 삶에 단 몇 개로 정리되는 정답이 과연 있기는 한 걸까.

 

그럼에도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더 알 것 같은 대상에게 의존하고 싶어 한다. 뭐라도 한 마디 듣고 나름대로 참고하겠다는 것이다. 내 주변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끔 자녀 교육에 대하여 질문을 받곤 하는데, 우스갯소리로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이라는 강의에서 들은 얘기를 해 주기도 했다. 대략 이렇다.

 

엄마: 스님, 우리 애는 공부에 관심이 없어서 정말 걱정이에요. 어떻게 해야 하죠?

 

법륜: 어머니 말씀처럼 어떤 엄마가 이렇게 말했어요.

우리 아이가 도무지 공부를 안 하고 놀기만 하니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 말을 들은 옆의 엄마가 그러더래요.

아이고, 부럽네요. 우리 아이는 글쎄 오토바이를 타요.’

그러니까 다른 엄마가 말했죠.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우리 애는 지금 감방에 갇혀 있네요.’

한동안 표정 없이 듣고 있던 또 다른 엄마가 이러더래요.

 

‘... 모두들 좋겠어요. 우리 아이는... 죽었어요.’

 

진담 반 농담 반이었지만 사람들은 이 얘기에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말이 쉽지 정작 자식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누구나 자식이 감옥에 있지 않고 오토바이를 타지 않는 건 당연하게 여길 테고 거기에다 공부까지 잘 하기를 바라지 않겠는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키도 크고 운동도 잘하며, 인성이 좋아 친구도 많고, 악기도 잘 다루고 효심이 있는 자녀이기를 원하지 않는가. 결국 많은 부모는 자식이 슈퍼맨 쯤 되어야 만족할 수 있다는 얘기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처럼 개인의 경쟁이 치열한 곳에서는 이렇게 끝도 없는 욕심이 생길 수도 있겠다. 어느 부모가 이런 정글 같은 사회에서 자식이 남에게 뒤처지는 걸 편히 두고 보겠는가.

 

요즈음 유례없는 폭염이 계속되는 가운데 여러 안타까운 죽음이 뉴스를 통해 알려졌다. 몇 주 전엔 출근길에 외손자를 유치원에 내려 주려다 깜빡한 외할아버지 사건이 있었다. 아침 회의 준비에 정신이 팔렸는지 차에 아이가 있다는 걸 잊고 출근하여 회사 일을 보고 오후에야 뜨거운 차 안에서 숨진 아이를 발견한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주에 대한 사랑은 때론 부모의 그것보다도 훨씬 끔찍한 법인데 이런 비극이 일어났으니 과실의 유무를 떠나 외할아버지가 앞으로 감당할 괴로움과 죄책감의 크기는 상상이 안 된다.

 

또 얼마 전엔 어린이집 차량에서 내리지 못한 아이가 7시간이나 갇혀 있다가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밖에만 있어도 뜨거운 날씨에 꽉 닫힌 차 안에서 죽어갔을 아이의 사연에 직장 동료들과 주변 지인들 모두가 안타까워 했다. 자식을 낳고 키운 사람이라면 이런 비극이 생길 때마다 슬픔의 크기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실감한다. 남의 자식이지만 내 자식의 일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고 저런 일을 당한 부모는 얼마나 슬플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나 하며 눈시울을 적시기도 한다.

 

며칠 전엔 포항의 해병대에서 테스트 비행을 시작하자마자 추락한 헬기 사고로 군인 여럿이 사망하였다. 한창 젊음의 에너지가 넘치는, 글자그대로 꽃다운 20대 초반에 국가를 위해 복무하다 자신의 잘못도 아닌 이유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극을 맞이한 군인들 중에 내가 가르치는 2학년 어느 학생의 형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슴이 먹먹해지고 온갖 감정이 속에서 다투는 듯 했다. 매일의 뉴스에서나, 그것도 냉정하게 사실 전달만 하는 진행자의 입을 통해서나 듣는 머나먼 남의 일로만 인식할 뿐이었지만 알고 보니 어이없게도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이다. 서울 어느 대학교를 다니다가 입대했다는데 졸지에 형을 잃은 동생 뿐 아니라 생때같은 아들을 먼저 보낸 부모는 애를 끊는 고통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야 할까.

 

어제 이런 이야기를 접하고 나서의 퇴근길은 무거웠다. 집에 온 뒤 외출할 일이 있어 문을 열었는데 앞집의 열린 현관문으로 드나드는 경찰들과 마주쳤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나를 그들은 건성건성 피했고, 집안에선 주인아저씨의 비명과 뒤섞인 울음이 들렸다. 1층으로 내려와 보니 이미 와있던 구급차가 하릴없이 돌아나가고 있었고 경찰차만 덩그러니 남은 게 보였다. 앞서 본 경찰과 집 안의 어렴풋한 상황으로 유추할 수 있음에도 설마 우리 앞집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싫었다. 한쪽에 모여 웅성거리는 아파트 주민들에게 그 집에 무슨 일이 났냐고 물었더니... 2인 앞집 둘째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3년 전 아파트 이쪽 동에서 저쪽 동으로 메뚜기처럼 옮기던 우리가 이사 들어오던 날, 열린 현관문으로 슬그머니 들어와 이삿짐으로 어지러운 우리 집을 보며 이사 오시나요?’라고 묻던, 귀엽고 똘똘하게 생긴 초등학생 꼬마였다. 마침 기르던 앵무새를 보며 신기해했고, 한번 만져보라고 아이의 어깨에 새를 올려주기도 했다. 가끔 집 앞에서 태권도복을 입은 채 자전거를 세우는 걸 보곤 했다. 학원에 오가는 길에 마주치면 이제 몇 학년 됐냐고 묻기도 했으며 공부 너무 열심히 하는 것 아니야?’라고 농을 치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어 꼬마 티를 벗는 모습에 ~, 키 많이 컸네라고 말을 걸기도 했던 아이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는지, 성적의 압박에 시달렸는지, 누가 몹시 괴롭혔는지... 아내는 아이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왜 아무에게도 힘든 걸 얘기하지 않았을까, 앞집의 아저씨 아줌마가 교사인데도 왜 도움을 주지 못했을까 하면서 연신 자책하듯 눈물을 흘렸다. 직장에서 달려온 아이의 엄마가 택시에서 내려 멍한 표정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았고, 그 뒤로 나는 선약에 맞춰 가야 하는 터라 무슨 일이 더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와 아내는 이젠 텅 비어 적막한 앞집의 무거운 공기를 느끼며 밤을 보냈고, 오늘 아침엔 아픈 가슴으로 각자의 직장을 향했다.

 

죽음도 삶의 일부라고 하지만 이것은 멀리서 일어난 죽음이나 천수를 누린 이에게나 어울리는 말일 게다. 어린 아이들이 폭염 속에서 희생된 것도 안타깝고, 젊은 나이에 군에서 맞이한 죽음도 애달프다. 하지만 종종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고 앞집 아저씨랍시고 괜히 친한 척했던 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어도, 배드민턴이라도 같이 해본 적 없어도 바로 현관문을 마주한 집 아이의 죽음이라 더욱 그렇다. 이미 되돌리지 못할 일임에도 차라리 어떤 드라마 안에 있거나, 현실과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흡사한 가상현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먼저 간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는데, 말이 좋아 그렇지 과연 이런 일을 당한 부모라면 감당이나 할 슬픔일까. 중국 영화 <대지진>에서 폐허 밑에 깔린 어린 딸을 포기해야만 했던 엄마는 평생 이렇게 얘기한다. ‘뭔가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건지 잃어버리기 전에는 절대 모른다.’ 일을 당한 부모의 마음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런 비보를 접할 때마다 자식을 가진 사람으로서 공감되는 상실의 감정은 전혀 다른 색깔이라는 느낌이다.

 

새삼스럽지만, ‘별일 없는일상이 고맙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도 긍정하고 싶다. 가수 장기하는 나는 별일 없이 산다.’라는 노래에서 (역설적이긴 하지만) ‘내가 별일 없이 산다는 건 네가 깜짝 놀랄 일이라고 한다. 직장이 별일 없이잘 굴러가는 것, 나도 사랑하는 가족들도 별일 없이건강하다는 것, 가까운 사람들이 별일 없이잘 살고 있다는 것 등 모두가 별일 없는것은 얼마나 크게 감사할 일인가.

 

날이 새자마자 밤새 참았다는 듯 목청 높여 나를 깨우는 산새들이 고맙다. 바쁘게 씻고 먹고 출근하는 아침이 고맙고, 되네 안 되네 하면서도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직장이 고맙다. 한결같이 대해주는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고맙고, 같이 취미를 즐기며 밤새도록 놀아주는 동호인들이 고맙다. 비바람에도 끄떡 않고 나를 편하게 재워주는 집이 고맙고, 언제나 상큼한 풀 내음을 선사하는 집 앞 공원이 고맙다. 횡령할 만큼의 돈을 만질 일이 없으니 죄짓지 않아 고맙고 남을 고생시킬 만한 권력도 없어 고맙다. 적당한 음주도 가능한 체질이 고맙고 많이 아픈 곳이 없는 몸도 고맙다. 크고 예쁜 소리를 내주는 내 악기도 고맙고 연습에 잘 따라 주는 손가락도 고맙다.

 

그 무엇보다도, 가족 모두가 살아있어 고맙다. 볼을 부비면 보드랍고 안으면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는... 일상은 이렇게 고마운 것이다.